벽 위에서 느낀 자유와 설렘 그리고 자신감
처음 클라이밍 장에 갔을 때는 나는 색깔의 의미를 몰랐다. 벽엔 수십 가지 색의 돌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 위를 거미처럼 기어 다녔다. 누군가는 새처럼 날았고 누군가는 낙엽처럼 떨어졌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나고. 아직도 클라이밍장 초입에 들어설 때면 설레는 긴장감이 있다. 새로운 암벽화를 조여 신고 손에 초크를 묻히는 순간부터 이미 나만의 작은 모험이 시작된다. 처음 벽 앞에 서면 늘 같은 생각이 든다. "와 이렇게 높지?" 같은 벽인데 오늘은 더 까마득하게 높이 느껴진다. 오늘도 벽 위에 있는 홀드들이 마치 나를 장난스럽게 비웃는 것 같다. "올라올 거면 올라와 보든가?"
클라이밍장으로 유명한 더클라임 구로점. 지난주에는 더클라임 영등포점에서 클라이밍을 했었는데 너무 어려워졌다. 마치 잡을 곳은 분명 있는데 내 팔 길이는 늘 부족하다. 발판은 미묘하게 멀고 내 균형 감각은 영 믿음직스럽지 않다. 그렇게 몸을 비틀고 발끝을 구겨 넣다 보면 어느새 나는 허공에 매달려 있다. 그 순간 나는 꼭 복숭아 같다. 나무 끝에 매달려 흔들리다가 금방이라도 툭 떨어질 것 같은 복숭아.
한 크루원이 "오른발 좀 더 올려요! 거기 아니야 옆이에요!" 하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도 항상 반 박자씩 늦게 들린다. 이미 허공에서 팔이 후들거리는 나로서는 그 조언이 들릴 때쯤이면 거의 떨어질 타이밍이다. 나의 머릿속은 단순하다. 아마도 이렇게까지 하게 될지는 몰랐지!
클라이밍장 벽 위에서 있을 때면 나 혼자 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초크가루에 뭉쳐있는 건조한 손으로 마지막 홀드를 양손으로 터치를 하면 마치 세상 끝에 있는듯한 포즈를 잡는다. 그런데 밑에서 찍어준 사진을 보면 이상과 현실은 전혀 다르다. 다리는 어정쩡하게 꼬이고 표정은 혼비백산에 간혹 크루원들이 "너 왜 오징어처럼 매달려 있는 거 보여" 라며 배꼽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늠 꼭대기에 올라서는 순간 그 마음은 설명하기 어렵다. 손끝은 저릿저릿하고 팔은 떨리지만 내려다본 풍경은 다르다. 바닥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런 미묘한 감정이 생긴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하늘을 걷는 복숭아'가 된 기분이다. 바람에 흔들리듯 가볍게. 하지만 땅과는 조금 멀리 떨어져 벽아래에 있는 복숭아.
그날은 벽 앞에서 긴장감이 유난히 컸다. 손과 발이 떨렸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엔 끝까지 올라간다." 홀드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천천히 몸을 올렸다. 중간에서 몇 번 흔들렸지만 그때마다 호흡을 고르고 발끝을 정확히 디뎠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홀드에 손을 댔을 때 세상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매트는 작게 느껴지고 내 마음은 높이 떠 있었다. "드디어, 내가 해냈구나."
그 짧은 순간의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하늘 위를 걸었던 경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벽 위에서 내려오면 다시 현실이 찾아온다. 안전하게 내려오려고 땀이 머리에 뻘뻘 흘리고 있다. 그리고 벽을 타느라 까진 손가락, 숨이 차오르는 가슴, 그리고 초크로 하얗게 된 운동복. 그런데도 이상하게 후회가 없었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이 시원했다.
처음 클라이밍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저 '운동 취미로 하나 더 시작 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막상 벽 앞에 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잡을 게 보이는데 손은 안 닿고 발은 허공에 매달려서 혼자 공중부양 중인 모습이다.
완등 후 나는 홀드 사이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벽 위에서 느껴지는 고요와 자유, 그리고 온전히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은 평소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내 안에는 작은 성취와 자신감이 폭발하는 듯했다. 그때 깨달았다. 클라이밍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자신과 마주하고 두려움을 극복하며 자유를 느끼는 시간이라는 것을. 클라이밍이 멋있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꽤 위험한 운동이다.
홀드를 잡다가 손가락이 까진 자국을 보면 "아 오늘 키보드 치기 힘들겠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들지만 벽 위에서는 괜히 멋있게 자세를 잡아도 밑에선 다 보이겠지. 나 혼자 영화 찍는 줄 알았는데 친구는 "야 땀 닦아 땀!" 하고 웃는다.
그래도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희한하게 모든 게 용서된다. 손목은 욱신거리고 팔은 떨리는데 내려다보는 순간 잠깐은 '하늘을 걷는 복숭아'가 된 기분. 땅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작은 자유다.
그리고 내려오면 현실이 다시 찾아온다. 까진 손가락, 초크 가루 범벅, 터질 듯한 숨. 그런데도 결국 또 벽 앞에 선다. 이유는 단순하다. 재밌으니까. 벽에서 떨어져도 괜찮다. 오늘도 끝나고 먹으러 갈 거니까. 클라이밍은 잠깐의 고통을 참고 순간 이상한 감각이 드는. 몸이 떠오르는 것도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묘한 정적. 마치 중력과 약속을 잠시 미룬 것처럼.
구름을 디디며 하늘을 걷듯이. 몸은 둥글고 부드럽게 빛을 머금은 분홍빛이었고 털이 살짝 뽀송하게 피어 있었다. 그건 복숭아였다. 복숭아가 걷고 있었다. 정확히는 하늘을 걷는 복숭아.
벽을 오르는 동안 나는 내 안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한계를 하나씩 마주했다. 떨어지는 것, 힘이 부족한 것, 생각보다 느린 속도.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조금씩 성장하게 만들었다. 홀드를 잡고 올라갈 때마다 나는 단순히 벽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마침내 나는 한 루트를 완전히 오르고 벽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손과 발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초록색 홀드에서 시작된 작은 도전이 이제는 나를 하늘 위에 올려놓았다.
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달랐다.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을 견디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나는, 하늘을 걷는 복숭아가 되었다.
벽 위에서 느낀 자유와 설렘 그리고 내 안에서 피어난 자신감은 앞으로 내가 맞이할 모든 도전을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바꾸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