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비는 혼자 사냥하고 혼자 살아간다.
조용한 숲속의 강자 담비
산의 깊은 숲속을 걷다 보면 흔히 볼 수 없는 귀여운 존재가 있다. 조용하지만 날렵하고 단독으로 산에 살아가면서 강한 생존력을 지닌 동물. 바로 담비다. 담비는 겉보기에는 유순하고 날렵한 작은 야생동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숲의 포식자이며 독립성과 민첩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가끔 담비를 떠올릴 때면 내성적인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 소리 없지만 그러나 결코 약하지 않은 존재. 내성적인 사람은 말이 적고 눈에 띄지 않지만 내면은 단단하다.
담비는 복잡한 감정을 가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조용히 세상을 관찰한다. 마치 숲 속 나뭇가지 사이를 조심스럽게 걷는 담비처럼 이들은 눈에 띄지 않게 삶을 헤쳐 나간다. 그러나 위협이 닥치면 망설이지 않는다. 담비가 자기보다 큰 동물에게도 맹렬히 저항하듯 내성적인 사람도 어떤 순간엔 누구보다 강하게 자신의 길을 지킨다.
담비와 절벽, 고독을 오르는 존재들
살아간다는 건 끝없는 오르막을 견디는 일이다. 누구도 그 길의 끝을 알지 못하고 왜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 그 고요하고도 치열한 여정을 나는 두 존재로 보고 있다. 하나는 숲의 깊은 곳에서 살고 있는 담비, 그리고 또 하나는 벽을 오르는 한 명의 클라이머다. 전혀 다른 장소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그들의 삶은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바로 목적을 향한 무언의 집중과 고독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 그리고 실패를 견디며 다시 나아가는 삶들이 몹시 닮았다.
절벽 앞에 선 사람은 안다. 이 길이 쉽지 않을 거란 걸. 때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걸. 그러나 나는 손가락 하나를 바위틈에 끼우고 신발의 고무 끝을 작은 홈에 얹으며 천천히 올라간다. 클라이머에게 절벽은 단지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경계이고 내면의 침묵이며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요함이다. 클라이머는 스스로를 벽에 내맡기며 매 순간 자신을 시험한다. 발끝에 실리는 중력, 손끝에 느껴지는 돌의 거칠기, 흐르는 땀방울까지. 삶은 이 짧은 감각들 안에서 집중된다.
누군가는 묻는다. 왜 오르느냐고.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러나 그들에게 의미는 정점에 있지 않다. 과정에 있다. 고통스러웠지만 끝까지 버텨낸 하루. 떨어졌지만 다시 붙잡은 손. 실패가 아니라 계속해서 시도했다는
나의 다리의 흉터가 그 존재를 증명한다.
그녀의 삶엔 계획보다 감각이 앞선다.
담비는 겉보기에는 작은 동물이다. 짧은 다리, 날렵한 몸, 맑은 눈. 그러나 그 안에는 매 순간 놓치지 않으려는 긴장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담비는 무리를 짓지 않는다. 외롭지만 단련된 그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숲은 언제나 예측이 불가능하다. 먹이는 도망치고 가지는 꺾이며 눈보라는 흔적을 지운다. 하지만 담비는 멈추지 않는다. 단단한 발바닥과 유연한 척추. 무엇보다도 머뭇거리지 않는 용기만이 그녀를 다음 순간으로 이끈다.
그녀의 삶엔 계획보다 감각이 앞선다. 계산보다는 직관이 두려움보다는 결단이 그의 몸을 지배한다. 겉보기에는 무모해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담비는 누구보다 자기 삶의 구조를 잘 아는 존재다. 누구보다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알고 있다.
고독과 몰입, 그리고 인간의 자세
담비도, 클라이머도 혼자다. 그러나 그 고독은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과 더 깊이 연결되는 방식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들여다본다. 바람의 방향, 나무의 떨림, 바위의 균열, 자신의 호흡과 맥박. 외로움을 감내하는 대신 그 고독을 받아들이고 동화되는 존재. 이 두 존재를 바라보며 문득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그들은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으며, 그저 스스로의 길을 살아낸다. 그러나 그 조용한 존재 안에는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담겨 있다. 삶은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매일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벽 앞에 서 있다. 누구에게는 그것이 현실이고, 누구에게는 관계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 벽은 때로 너무 높고 너무 조용해서 돌아서고 싶은 유혹을 만든다. 하지만 담비처럼 한 발 내딛고 클라이머처럼 다시 손을 뻗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휘둘린다. 비교, 평가, 불안, 성공이라는 이름의 허상들. 그 안에서 자신을 잃어가며도 정작 멈추지 못한다. 그러나 담비와 클라이머는 우리에게 다른 길을 말해준다. 삶이란 도달보다 존재의 방식에 있다. 누가 보지 않아도 박수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실패를 실패라 여기지 않고 고독을 두려움이라 여기지 않는 것. 그리고 조용하지만 단단한 몰입 속에서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것.
오늘도 숲을 가른다.
담비는 오늘도 숲을 가른다. 어둠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클라이머는 오늘도 절벽 앞에 선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길이지만, 다시 손을 뻗는다. 그들의 모습은 작지만 단단하다. 위대하지 않지만 숭고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식의 한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살아간다는 건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넘어지고 주저앉고 다시 일어서며 끝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버티는 것. 그 조용한 투쟁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담비를 닮아가고 클라이머를 닮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끝까지 나아갔던 그 태도가 자신을 지켜낸 유일한 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끝마치며
혼자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 담비는 혼자 사냥하고 혼자 살아간다. 무리를 이루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그런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힘을 축적하고 더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 내성적인 사람 역시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을 필요 이상으로 갈망하지 않고 외로움보다는 사색을 즐긴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내면을 다지며 스스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사회는 떠들썩하지만, 숲은 고요하게 흐른다. 우리는 종종 말 잘하는 사람, 눈에 띄는 사람, 활발한 사람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영향력 있는 존재가 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조용한 리더,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사람, 누군가를 위해 침묵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 그런 이들이 사회라는 숲을 더 깊이 있게 만든다. 담비는 숲의 중심에서 우렁차게 울부짖지 않지만 그 존재 하나로 생태계의 균형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내성적인 사람도 그렇다.
그들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외침보다는 지속력으로 영향력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