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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화와 클라이밍 크루

성공하면 다 같이 나이스를 외쳐주었다.

by 홍매화



처음 크루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루트가 무엇인지도. 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꾸준히 클라이밍을 할 수 있었던 건 크루원들 덕분이었다.

내가 벽에 매달리면 밑에서는 "좋아요!", "조금만 더!"라고 외쳤다. 떨어지면 다 같이 웃고, 성공하면 다 같이 나이스를 외쳤다.
크루원들 사이에서 경쟁보다는 함께 올라간다는 감정이 멋졌다. 내 몸 하나, 간신히 버티던 나에게 크루원들은 마치 로프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응원에 매달려서 나는 오늘도 조금씩 홀드를 잡고 탑 위로 올라고 있다.



암벽화를 처음에 신었을 때는 발끝은 조여 오고, 발가락은 눌려서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아픈 게 맞는 거예요?"라고 채원에게 물어보았다. 옆에서 "맞아요. 암벽화는 편하게 신으면 안 돼요. 엄지발가락에 딱 맞게 신어야지 잘 올라갈 수 있어요." 나는 '아파야 잘 올라간다니..'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편한 운동화를 벗고, 불편한 암벽화를 택해야 한다는 걸. 그게 성장이라는 이름이란 걸.

처음에는 그저 미끄럽지 않게 해주는 신발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여화에서 나만의 암벽화로 각오를 대신해 주는 장비라는 걸.



클라이밍장 대여화를 신었지만 매번 사이즈가 애매했다. 발가락이 헐렁해서 홀드를 밟지 못할 때마다 마음도 같이 헛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같이 운동하던 동생이 "매드락 드리프터 암벽화는 홀드에 잘 잡아줘요."라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결국 주문 버튼을 눌렀다. 이틀 후, 집에 도착한 암벽화가 담긴 택배 상자를 열었다. 새카만 고무와 쇠 냄새가 나는 신발을 꺼내는 순간 두근거렸다. '첫 나의 암벽화라니' 어릴 적에 새 운동화를 신고 잠들던 밤처럼 설렜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암벽화를 신고 다시 오른 벽은 정말 달랐다. 발끝에 홀드를 콕 찍고, 고무가 벽을 붙잡아 주었다. 이 순간 '내가 진짜 클라이머인가?'라는 생각이 내겐 큰 기쁨이었다.



몇 달이 지나고, 암벽화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벽을 오르는 루틴을 잡았다. 하지만 어딘가 조금 허전했다. 늘 혼자 루트를 보고, 혼자 시도하고, 혼자서 떨어지는 시간이 반복되자 뭔가 같이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클라이밍장 게시판에서 한 장의 포스터를 보았다. “초보 환영 클라이밍 크루 모집”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연락을 했고, 그렇게 나는 클라이밍 크루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 모임 날, 낯선 얼굴들을 보며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벽 앞에서는 손과 발이 먼저 통했다.



한 크루원인 준호는 말없이 내려와 있는 나를 향해 "거기서 오른발 조금만 더 올려보세요" 하고 외쳤고, 다른 크루원인 유정은 내가 실패한 루트를 함께 고민해 주었다. 그렇게 함께 오르며, 나도 조금씩 성장했다. 못 오르던 루트를 다시 시도하고 드디어 완등했을 때는 모두 나이스를 외쳐 주었다.

누군가의 성공이 우리의 기쁨이 되었다. 한 번은, 크루원 언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예전보다 많이 늘었어."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는 길, 지하철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이상하게 반짝거렸다.



클라이밍은 나를 믿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더 멀리 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암벽화 한 켤레가 내게 가져다준 건 단지 장비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사람들, 그리고 나를 믿는 힘이었다.

지금도 나는 초보 클라이머다. 루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언젠가 오를 수 있다는 걸. 클라이밍은 혼자 하는 운동 같지만 결국 함께하는 성장의 기록이라는 걸.



나도 그 이야기 속 한 줄쯤은 맡을 수 있을까. 벗어던졌던 암벽화를 다시 신고, 나는 조용히 웃는다. "혼자 오르면 도전이지만, 함께 오르면 이야기가 돼." 마지막에 크루원 모임장이 말하던 문장이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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