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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철현 Dec 04. 2023

그러니 흔들리지 말 것

똥꼬바지 집착남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은 서브를 넣을 때 자신만의 복잡한 루틴이 있다. 발바닥으로 땅을 고른 뒤 라켓으로 두 발을 털고 엉덩이에 낀 바지를 뺀 다음 양쪽 어깨와 귀, 코까지 만진 뒤 서브를 넣는다. 테니스는 경기 중 수십 번의 서브를 넣을 텐데 이런 행동을 매번 빠짐없이 한다는 게 놀랍다. 근데 어떻게 바지가 계속 엉덩이에 낄 수 있지? 바지의 침입인가, 똥꼬의 흡입인가?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신기했다. 나달 씨, 그냥 헐렁한 바지를 입지 그래요? 심지어 나달은 이 서브 루틴 외에도 항상 똑같은 높이로 양말 신기, 경기 중 라인 밟지 않기, 라인을 넘을 때는 오른발로 넘기, 음료수의 상표가 밖으로 향하게 놓기 등 12가지 루틴이 더 있다고 하니 경이로움을 넘어 그의 신경쇠약이 걱정될 정도다.


운동선수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루틴이 있다. 회사에서도 주변을 둘러보면 그 스펙트럼은 매우 다채롭다. 사계절 변함없이 아아를 사들고 출근하는 K부터 점심 먹고 오후 업무 시작 전 항상 물티슈로 책상을 닦는 E, 매시간 정각에 아들 사진·동영상을 보는 S까지. 매일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하는 Y팀장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화장실로 가 큰일을 본 뒤 가벼운 장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그가 자신만의 루틴이라며 돌연 나에게 똥밍아웃을 했다) 나 같은 경우, 출근길 지하철 4호선에서 EBS 영어 프로그램 입트영, 2호선으로 갈아타며 귀트영을 듣고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매일 반복되는 기시감이 《엣지 오브 투모로우》급이다. 영어 실력은 늘 제자리걸음이고 지적 능력은 나이를 먹을수록 퇴행하는 듯하지만 왠지 그렇게 해야 하루를 더 힘차게 시작하고 또 알차게 마무리하는 것 같다.


루틴 하면 편의점도 빼놓을 수 없다. 편의점은 점포들마다 매일 규칙적이고 정형적인 행위들이 아주 쫀쫀하게 엇끼어 돌아간다. 그것은 편의점의 365일 24시간 연중무휴를 지탱해 주는 꼿꼿한 척추이자 근원적인 동력이다. 편의점의 루틴은 점포 상황과 점주 스타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보통 물건이 입고되는 요일과 시간에 맞춰 세팅된다. 편의점은 보통 하루에 2~3회, 오전과 오후, 밤으로 나뉘어 물건이 들어오는데 그에 따라 시간대별 근무자들의 역할이 정해진다. 단조로운 듯 꽤 정밀한 구석이 있다. 예컨대, 자주 가는 한 편의점의 카운터 벽면에 붙어 있는 루틴을 소개하자면 대략 이렇다.(A4 용지에 ‘CU의 하루’라는 타이틀이 귀엽게 적혀 있다)


- 새벽 2시 30분: 신문 옵니다.

- 아침 9시: 도시락 폐기 빼주세요. 냉장고 바구니 남은 상품 있으면 보충 진열.

(화, 목, 토) 9시: 담배랑 잡화류 옵니다

- 오후 2시 30분: 물건(라면, 과자, 음료수 등) 옵니다. 검수 후 냉장고부터 진열할 것. *급할 거 없으니 카운터 보면서 천천히~

- 밤 21시: 폐기 빼주세요. 그러다 보면 도시락과 우유 옵니다. 간편식품부터 먼저 진열하고 우유는 야간 근무자가 검수 후 진열.

* (맨 밑에 무려 느낌표 5개의 강한 어조로) 퇴근 전 음식물 쓰레기통 청소 필수!!!!!


그 외 A4 용지 구석구석에 친절한 인사, 상품이랑 카운터 정리정돈 철저, 우유 유통기한 수시로 확인 등 자잘한 미션과 가이드라인들이 진중하게 적혀 있었다. 이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착착착 돌아가지 않으면 점포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전제가 A4 용지에 워터마크로 찍혀 있는 듯했다. 나도 직영점장을 해봤기에 알고 있었다. 혹여나 누군가의 착각, 실수, 태만, 고의 등으로 이 중 사소한 루틴 하나라도 빼먹는다면 점포는 통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만약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면? 추가 진열 없이 냉장고가 텅 비어 있다면? 음식물 쓰레기통이 넘치기 일보 직전이라면? 이건 똥꼬바지 루틴집착남 나달에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편의점의 루틴은 특정한 습관이나 일련의 의식이라기보다는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릴레이 페달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쉼 없이 달려야 하는 우리들의 인생처럼. 무엇보다 모든 루틴은 약속과 신뢰를 지키는 일이다. 사람들은 편의점이 늘 가까이에서 내가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한결같이 제공하길 바라는데 그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손님에게나 편의점에게 큰 재앙이다. 마치 기대와 실망이 갈라놓는 우리들의 관계처럼.


이를 비웃듯 아주 파괴적인 루틴을 가지고 있던 한 점주가 있었다. Y점주는 저녁 7시 본인이 퇴근하기 전, 낮 시간 동안 손님들이 휩쓸고 간 텅 빈 진열대를 바라보는 것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낙이었다. 뻥뻥 뚫려 있는 진열대를 봐야만 ‘오늘도 장사를 잘했구나’ 싶어 힐링이 된다나. 그녀는 누가 봐도 폭탄 맞은 것 같은 어수선한 점포를 마치 스위스의 그린델발트의 풍광처럼 묘사했다. 이 불성실한 루틴을 파괴적이라고까지 설명한 이유는 물건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는 업계의 상식에 역행하는 Y점주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매출과, 그걸 지켜보는 L선배의 전쟁 같은 점포 사랑 때문이었다. 추정컨대 그것은 폐기율 제로를 만들려는 Y점주의 숨겨진 의중이 만들어낸 기이하고 다소 변태적인 루틴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닌 L선배는 적정 폐기율과 최대 수익률 등의 논리로 무장해 저녁 피크타임을 위해 상품 발주를 넉넉히 더 하고 수시로 보충 진열을 하는 게 좋겠다고 수없이 얘기했지만.. 소용없었다. 파괴된 점포처럼 L선배의 설득도 번번이 무반응에 격추됐다. 야간에 물건이 들어올 때까지 잠시 빈약한 시간이 생기더라도 Y점주는 자신의 이 미필적 루틴을 점포의 수익보다 더 중요시했다. 이후 Y점주의 이 루틴을 깬 것은 결국 점차 내리막을 걷게 된 매출이었다. 올 때마다 상품이 없는데 낮이든 밤이든 누가 계속 찾아오겠나.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루틴은 시간이 두는 패착일 뿐, L선배는 소쩍새처럼 서러워했다.(왜 내 말을 안 듣고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냐고~~)


이런 극단적 사례를 제외하고 전국의 모든 편의점들은 지금도 각자의 건강한 루틴을 부지런히 실행하고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밀도 있게 쌓인 그들의 규칙과 노하우들은 편의점이라는 세계의 단단한 지층이 되었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프로그래밍된 편의점의 루틴은 손님들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 우리들의 루틴도 마찬가지다. 변함없는 그 일관성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일상의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해 준다. 별거 아닌 작은 습관이 하루의 기운을 좌우하고 잘 설계된 생산적 반복은 훗날 좋은 결과로 열매를 맺는다. 나달도 (좀 지저분하긴 하지만) 그런 루틴으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리라. 그러니 조금 힘들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말 것!


어느 날 편의점에 갔는데 문이 잠긴 채 ‘잠깐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가 써 붙여져 있었다. 열심히 돌아가던 엔진이 잠시 쉬어 가는 때다. 어떨 땐 얼마나 급했던지 안내문이 문 앞 바닥에 그냥 버려진 듯 나뒹굴고 있을 때도 있다. 암~ 똥은 못 참지. 매일 부처님 앞에 108배를 올리던 성철 스님도 급똥 앞에선 잠시 성불을 멈췄을 터. 항상 열려 있을 줄 알았던 편의점 문이 굳게 닫혀 있을 때 ‘에잇, 뭐야~’하고 불평할 수 있겠지만 똥 앞에서만큼은 다 같이 그 거사의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주고 돌아온 귀환자에겐 무언의 환영으로 대하는 것이 이 바닥의 불문율이다. 아무튼 빡빡한 루틴일수록 잠깐의 휴식이 필요하고 때론 약소한 빈틈도 관대하게 인정해줘야 한다는 걸 잊지 말자.


이런, 편의점의 루틴을 얘기하려다가 똥 얘기를 너무 많이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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