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단어

드디어 이날이 왔네. 모든 걸 끝내고 후련한 마음으로 너를 볼 수 있는 날이.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그 긴긴밤을 지나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어. 언젠가 너에게 꼭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결국 이제서야 쓰게 되네.


긴 마라톤을 마친 선수의 일상은 어때? 최선을 다 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분이 있잖아.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 한번도 최선이란걸 다해 본적이 없는 것 같거든. 숨이 턱까지 차서 더이상은 못하겠다 라고 할만큼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어서 가끔은 네가 부러웠어. 너는 분명 힘들어서 헉헉대고 있을 테지만 최선의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용기가 너에게는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넘어지는게 겁이나 최선을 다해 달리지 못하는 사람이거든. 너에게 궁금한 게 참 많아. 시간이 된다면 너와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너는 나와 비슷한 게 참 많잖아. 내가 느낀 것들을 너도 느꼈을지, 너는 어땠을지 궁금해. 너에게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너를 응원하게 됐어. 너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너를 응원하는 일이 꼭 나를 응원하는 일처럼 느껴졌거든.

나는 요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어.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날들이야. 입 밖으로 참 행복하다고 자주 말해. 그리고 아 배부르다고도 자주 말하고. 밖은 춥고 집은 따듯하고 배는 부른 날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잖아. 행복이란 게 내가 노력한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소홀하다고 달아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내 옆에 있을 때 실컷 누리는 거야. 가득 느끼고. 자주 말하고. 그러면 왠지 오랫동안 내 옆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만져지지 않는 행복이 만져지는 것 같기도 하고.

최근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아주 못된 말을 들었어. 처음에는 울컥 눈물이 났다가, 다음에는 화가 났다가 그 다음에는 마음이 내내 아팠어. 아직도 그 눈빛과 차가운 말투와 못된 단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오랜만에 정말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생각을 했어. 아주 무시무시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있지, 그런 생각을 아주 오랜만에 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어. 세상이 내 뿜는 온기를 한껏 받아 놓고 한번 바람 불었다고 투정 부리는 내가 부끄러웠어. 그리고 생각했어. 온기보다는 한기를 더 많이 받고 있을 누군가에 대해서.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리 아프고 힘든 세상이라고 해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그래서 조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그들의 마음에 한 발짝 정도 다가간 것 같았거든. 내가 살 수 있는 삶은 하나지만 짐작해 볼 수 있는 삶이 더 많아지는 기분이었어. 헤아려 볼수 있는 삶이 하나 정도 더 늘어난 것 같았어.


너에게도 나에게도 앞으로 이런 일은 수없이 많이 일어나겠지. 그러면서 우리는 어떤 어른이 되어갈까? 못된 말을 많이 들은 우리는 못된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못된 어른에게 상처받은 우리는 또 다른 못된 어른이 되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가는 걸까? 그건 너무 슬픈데. 나는 못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데. 세상이 나를 못되게 만들 때마다 나는 우리 아버지를 생각하곤 해. 아버지는 나쁜 일을 많이 당할수록, 못된 말을 많이 들을수록 다정한 사람이 되어갔거든. 내가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 가 아니라 내가 아픈 것처럼 너도 아팠겠구나. 내가 외로웠던 것처럼 너도 외로웠겠구나. 라고 말하는 사람이거든. 한번 아파본 사람은 그 아픔을 아니까. 그 아픔을 어루만지는 법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무거운 부탁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너와 내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혼자서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너와 함께라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뭐든 혼자서는 힘든 일도 같이하면 할만하잖아. 우리 서로를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진짜 행복은 그곳에 있을지도 몰라.

너와 나누고 싶은 대화가 기쁜 대화였는지 슬픈 대화였는지 모르겠어. 슬픔과 기쁨이 한 장 차이인 것 같기도 하고. 너를 보며 기쁨과 슬픔 모두를 느끼니까. 나는 가끔 못된 말을 듣고, 울고, 화를 내고 아파해. 하지만 자주 사랑을 말하고, 웃고, 기뻐하며 감동해. 살다보면 자주 못된 말을 듣고 가끔 사랑을 말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그래도 괜찮아. 나는 곧 다시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거야. 아직은 그렇게 믿고 있어. 가난한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사랑에 대해 노래할 수 있대. 가난한 마음을 지닌 네가 자주 사랑에 대해 노래했으면 좋겠어. 네가 못된 말을 들었을 때도 화가 나서 끙끙 거릴 때도 사랑을 잃지 않기를 바라. 너에게 가난한 마음과 슬픔을 견딜 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언제나 기도할게. 되도록이면 네가 세상의 온기를 더 많이 느끼며 살기를 기도할게. 너의 다정함을 부디 해치지 않기를. 나는 절대로 쓸 수 없을 너만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써 내려가기를 바라. 언제나 너의 이야기를 기다릴거야.


새로운 장을 시작한 너에게. 사랑을 담아 예진이가.



keyword
이전 22화세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