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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Dec 10. 2023

20대의 쓴맛, 80대의 쓴맛

몰래 흘려버리고 싶은 맛

-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58세 엄마의 이야기를 32살 딸이 듣고 적는 이야기.

- 엄마는 요양병원의 할머니들을 '엄마'라고 부른다

- 작품 속 이름은 가명을 사용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약은 쓰다. 아이들에게 인공 향을 첨가한 물약을 주기도 하지만, 아무리 달콤함을 추가했다고 해도 약 특유의 씁쓰름한 맛과 향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하물며 인공적 달콤함조차 들어가지 않은 가루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쓴 게 싫은 건 여든이 넘은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면서 목 넘김이 원활하지 못한 할머니들에게는 알약이 아닌, 가루약이 자주 처방된다고 한다. 그걸 물에 살살 녹여 홀짝홀짝 마시게 한다. 따뜻한 핫초코를 천천히 마신다면야 두 손 들어 반기겠지만, 쓰디쓴 약이 든 물을 시간을 들여 마신다는 건 오랫동안 그 쓴맛을 온전히 맛보아야 하는 지독함이다. 시럽을 탄 약을 극구 거부하는 아이가 있듯이, 요양병원의 쓴맛을 거부하는 할머니도 있는 법이다. 광순 할머니가 그렇다.


 그날은 평소 안 먹겠다며 치열히 고개를 돌리던 할머니가 웬일로 조용히 약을 받는 게 아닌가. 엄마는 드디어 이 할머니가 몸을 생각하시는 건가, 포기하신 건가 생각했다. 그래, 팔순이 넘으셨으면 약의 쓴맛 정도는 받아들이신 것이리라. 그래서 할머니가 천천히 약을 마시는 동안 옆에서 기구를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본 순간, 엄마는 외침이 섞인 한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

 광순 할머니는 엄마가 고개를 돌렸을 때, 슬쩍 잔을 기울여 조금씩 조금씩 흘리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 고개를 갑자기 든 엄마와 눈이 딱 마주치자, 그녀는 마치 손에 힘이 안 들어가서 흘린 것처럼 슬쩍 손을 떨며 앞섶에 흘리는 걸로 지점을 바꾸었다. 할머니는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에구구 나이 드니까는 손이 자꾸 떨려…”


     




 엄마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들은 풍경이다. 정확히는 직접 했던 행동이다. 손에 들었던 액체의 물성만 달랐을 뿐이다. 그건 대학생 새내기 시절, 술을 슬쩍 흘리던 모습이었다.     

 이제 십 년도 더 된 ‘라떼는’ 이야기하는 게 부끄럽지만, 막 20대가 되었던 내 혀끝에 남은 알싸한 쓴맛을 떠올려 본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사회적으로 대학생들의 술 강요 문화에 대해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해서는 않된다.’라는 분위기가 깔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완전히 그렇지도 않았다. 신입생들을 집합시킨다거나 험악한 언행으로 술을 마시게 하지 않는 대신, 일종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술을 자꾸 거절하면 그 자리를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듯한 분위기, 다들 흥겹게 마셔, 마셔, 하는데 초 치는 사람이 되는 분위기 말이다.


 그런 과도기적 상황에서 내가 다니던 학과와 동아리 술자리는 암묵적으로 ‘눈치껏’을 전략으로 택했다. 흥겨운 분위기에서 서로의 잔을 웃으며 채워주었다. 공기의 오디오를 필사적으로 채우는 모습을 보며, 나도 웃으며 그 잔을 받았다. ‘술로 친해지는 것보다 친해지고 마시는 술이 훨씬 달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다른 사람과 웃으며 장난을 치는 사이 슬쩍 술을 흘렸다. 걸릴 것 같은 순간에는 흠칫 취한 척을 했다. 다행인지 나는 알코올에 약했고, 맥주 몇 모금만 마셔도 금세 얼굴이 달아오르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술을 마시는 순간에도 안구 레이더가 앞, 옆, 뒤까지 발동되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마 서로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술을 마시기 싫은 사람은 모른 척 술을 받았고, 술을 주는 사람은 흘리는 술을 모른 척했다.

 20대 초, 나에게 술의 알싸한 쓴맛은 그런 눈치 협약으로 남아있다. (물론 지금처럼 소주 가격이 오른 시점에서는 그것도 못 할 짓이겠지만. 사실 요즘 술 문화는 잘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20대 초반의 무언 협약 전략은, 80이 넘은 이의 요양병원 생활에서는 통하지 않는 듯하다. 당시의 술이 오디오를 채우기 위한 매개체로써의 사치품이었다면, 할머니가 드셔야 하는 약은 당신의 몸을 위해 계약을 체결한 필수품에 가깝다.


 엄마는 웃으며 광순 할머니의 손에서 쓴 약을 가져갔다.

 “괜찮아 엄마, 내가 수저로 먹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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