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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Mar 04. 2024

혁신과 파괴에 지쳤습니다.

-평면의 공간이 필요하다



#1. 혁신과 파괴에 지쳤습니다.


 혁신, 창조, 창의, 융합, 복합, 파괴… 이런 수식어들이 질린다.

 기업이든 정부든 어느 조직이든 ‘혁신’을 들고 나온다. 제품은 죄다 혁신적인 기술이고, 공간은 복합공간, 규율과 질서는 파괴가 기본값일 정도다. ‘혁신적 인재’, ‘창조적 인재’를 뽑는다는 인사 공고를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 수식어가 없는 인재상이 더 혁신적으로 보일 정도다. 파괴되었다 융합되었다 혁신되었다 창조되었다-하는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보고 있자면, 게슈탈트 붕괴가 찾아올 것만 같다.


 뭘 자꾸 파괴한다는 건지, 뭘 자꾸 융합하고 연계해 혁신해나간다는 건지. 세상은 너무 빠르고, 심오하다.

 나는 기존에 뭐가 있는지조차 따라잡지 못했는데.



    


#2. 미술에서의 미니멀리즘


 이런 복잡한 것들에서 벗어나 최소한만을 허용하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미니멀리스트야!’라고 외치던 이가 미술계의 ‘미니멀리즘’ 작품을 마주한다면, 상당히 당황할지도 모른다. 나처럼 미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들이라면 더욱 말이다.



Untitled 무제, 1989 녹색 양극산화 알루미늄과 투명 플렉시 유리, 사진 안천호



 단순한 사물(플라스틱, 금속, 혹은 일상의 물건 등)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채, 전시장에 미술작품이란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을까.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그것들을 짐짓 진지하게 관람하는 척했지만, 사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도무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예술품을 보면 설명 없이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외나 벅참을 느끼기도 한다는데, 나는 감정의 잔잔한 물결도 느낄 수 없었다.

 

 <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책에 나오는 사진을 바라본다. 도널드 저드의 <무제>는 금속 사각형을 그저 일정 간격으로 늘어놓았다. 혹은 벽에 달아두었다. 나는 그 금속의 사각형들을 보며 나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에 골몰하다 이내 포기한다.

 줄이긴 줄였는데… 너무 줄이다가 그만 우리가 알던 것과는 멀어져서, 다시 ‘혁신과 창의’라는 놈들을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3. 극단적인 순수성


 『모더니즘의 원리는 한 마디로 ‘장르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회화는 회화다워야 하고, 문학은 문학다워야 하며, 연극은 연극다워야 한다는 것이 모더니즘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럼 회화가 문학이나 연극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캔버스’와 ‘물감’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 2차원이라는 회화의 고유한 형식을 최대한 살리자는 거죠.』

/ <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정서연 


    

 이 문장을 보고 어찌나 반갑던지. 본래의 목적에 대한 충실함. 단순한 기능을 하는 성실함! 복잡함을 떨쳐버리고 본질에 대한 추구는, 몇십 년 전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사람들 역시 가지고 있었나 보다. 아마 나만큼이나 기술과 기교 혁신에 피곤을 느꼈던 이들 아닐까.


 저자에 따르면, 고전주의 회화는 원근법 등의 기술을 사용하여 3차원을 2차원에 비슷하게 재현하고 하였다. 모더니즘은 고전주의 회화에서 구현된 3차원의 공간을 ‘환영’으로 보았다. 그 환영을 제거한 ‘평면성’을 추구했다. 2차원에는 2차원으로. 회화는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러나 무엇이든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 완전함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여 새로움을 만드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다. 모더니즘은 평면성을 추구했으나, 그럼에도 ‘환영’이 존재했다. 아무리 평면으로 그린다고 해도 물감과 물감 사이의 공간이 그림에 공간감을 부여했다. 캔버스 역시 그 두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의 환영마저도 없애려고 했던 시도가 바로 미니멀리즘입니다. 환영을 없애기 위한 이러한 시도는 결국 예술을 ‘사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 미니멀아트는 장르의 순수성을 극한으로 탐구하다가 예기치 않게 그것을 깨뜨리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지만요.』

/ <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정서연


 저자의 말에 따르면 회화에 ‘연극성’이 생겼다. 미니멀리즘은 극단적으로 환영을 없애고자 하였고, 어찌 보면 내 기준의 ‘회화는 회화답게’라는 정신을 파괴하고 만 것이다.





         



#4.

  나는 다시 책에 소개된, 미니멀리즘 작품이라는 금속의 네모난 직사각형을 본다. 다른 작품은 형광등 몇 개를 이어 붙여 놓은 것도 있다. 혹은 타일을 바닥에 깔아 둔 작품 사진도 있다.

 작품의 배경을 알고 보니,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이들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을 추구하며 표현해 낸 거구나. (지금 현대 미술로 보면 혁신적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미니멀리즘 이후로 창조적인 개념의 등장과, 다른 매체나 재료와의 융합을 통해 수많은 혁신이 일어나는 중이니 말이다.) 조금은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지 않고, 시선을 고정하여 겉핥기로나마 탐구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미니멀리즘의 작품만이 아니다.

 온갖 기교가 들어간 아득히 뛰어난 그림, 기존의 그림의 영역을 파괴한 작품, 3차원을 넘어 4차원으로 달려갈 것만 같은 기술과 결합된 작품. 영상, 퍼포먼스 (행위 예술)들. 이것들은 분명 새로운 즐거움과 영감을 준다.


 그러나, 나는 역시 아직은 평면에 연필과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에서 감동을 느낀다. 사람의 손 끝에서 붓을 타고 이어지는 붓터치와, 색감의 조합에서 느껴지는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꼽씹는 게 좋다.


 여전히 기존 문법을 파괴한 공간보다, 보수적인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인간이다.

 이것저것 버튼과 기능이 많은 가전기기보다 딱 밥만 잘 짓는 밥솥이나, 타이머만 있는 전자레인지를 보며 생활의 안정감을 얻는다. 카페와 식당과 전시관과 공연장을 합친 복합문화공간도 좋지만, 대부분 카페면 카페, 책방이면 책방, 화장실이면 화장실에 충실한 공간을 찾게 된다.


 나는 부단히 의미를 찾고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부지런한 유형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렇게 겉핥기로 느릿느릿 따라가는 정도에서도 충분한 즐거움을 느끼고, 새로움을 배운 시간 이상을 기존의 내 공간에서 보내야 한다.


 평면에서 튀어나와 내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 절제된,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마땅히 있는 것들.

 내게는 평면의 공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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