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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Feb 19. 2024

더는 신전을 짓지 않는 시대

건축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1. 이상주의 vs 현실주의     


다음 중 어떤 말이 더 불쾌한가?

“너는 참… 이상주의자구나.”

“너는 참… 현실주의자구나.”


 아마 전자가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에서 이상주의라는 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닿지 못할 무릉도원을 찬미하는 음유시인이나, 이리저리 핑계를 대는 탕아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는 현실 감각이 없다. 현실 감각이 없다는 건, 생활력, 삶을 살아가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현실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냉정하다는 비난이 섞였을지언정, 적어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내 밥벌이를 책임지는 ‘능력’ 있는 인간이라는 평가이기도 하다.

 가지 못할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며 신을 숭배하는 음유시인보다, 당장 씨앗을 뿌리고 다음 종자를 남겨두는 계획을 짜는 농부를 원하는 세상이다.

     

 이상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가치(자유, 정의)를 추구하기에 비이성적이며 때로는 가식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반면 현실을 외치는 이들의 주장은 다소 냉정하지만, 솔직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 완전한 자유와 정의를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이들이 훨씬 솔직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솔직함이란 실현 가능성이 되었다. 실현 불가능한 것을 외친다면 그것은 가식이며, 현실 감각이 없는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2. 더 이상 신을 찬미하지 않는 시대


 “우리는 이상화를 더 견디지 못할 것처럼 행동한다. 장식을 한 다리나 금박을 입힌 조각상을 경멸하기도 한다.”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이런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는 ‘건축’에서도 나타난다.


 중세 시대의 건축물을 떠올려 보자. 더는 위로 층을 쌓을 수 없는 뾰족한 첨탑, 건물의 지지대 역할은 조금도 해내지 못하는 신과 천사 조각상, 천장을 가득 채운 기하학적 무늬, 온갖 빛을 산란시켜 눈이 피곤해지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무늬를 새겨 넣은 손잡이. 정말이지 천문학적인 비용 대비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공간은 어떤가? 공간 활용도를 최대한 높일 수 있는 접이식 가구, 더 얇아진 채 벽과 천장에 한 장의 종이처럼 붙는 전자제품들, 좁은 면적에 더 높게 높게 층을 올릴 수 있는 아파트. 모든 걸 내려다볼 수 있는 ‘로열층’. 물론 미도 추구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성능’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우리는 고대성을 버렸다. 신화를 숭배하지도 않는다. 귀족적 자신감을 비난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고백하건대, 은근히 현실적인 면을 자랑으로 여긴다.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야. 쓸모없는 장식을 덧붙이지 않아. 닿지 못할 이상주의를 꿈꾸지 않고, 실용성을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독하다’는 평가가 ‘착하다’는 평가보다 마음에 들었다. 마치 갓 딴 꽃의 뒷면을 쭉 빨았을 때 느껴지는, 거칠게 씁쓸하지만 달콤한 꿀 같은 평가였다.






          

#3. 현실주의자의 이상주의적 읽기와 쓰기

   

 

“이상화된 건물에 새겨진 잠재력이 반드시 완전히 실현되어야만 그 가치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을 보며, 현실적인 인간이라 평가했던 스스로에게 혼란을 느꼈다. 이는 평소 내가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글쓰기와 독서를 하며, 나는 이런 식의 말을 종종 했다. 어떤 가치를 추구할 때, 설령 완전무결하게 실천하지 못해도, 그걸 추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말이다.

    

 나는 여전히 타인의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계속 누군가의 슬픔을 말하는 책을 읽는다. 바로 어제저녁 고기구이를 먹어 놓고서는 오늘 비건과 관련된 책을 읽는다. 오히려 완전할 수 없기에 더욱 계속해서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타인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계속해서 슬픔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어야 한다. 누구보다 세상에 찌들어 있지만 인간의 자유와 용기에 대한 책을 읽으며 감동한다. 그래야 한없이 이기적으로 되는 순간에 선을 넘지 않고 멈출 수 있게 된다. 갈등하는 순간에, 미미한 용기라도 낼 수 있게 되며, 음식을 배달할 때면 플라스틱 일회용품을 넣지 말아 달라는 칸에 체크한다. 비록 내 삶의 대부분을 비겁하고 소심하며, 환경을 파괴하며 살아가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렇듯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면 종종 이상주의자가 되었다. 현실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어쩌면 누구보다 이상주의자였을지도 모르겠다.


               




#4. 다시이상주의 and 현실주의

     

 “우리는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스인의 모범을 모방한다. 우리는 그들의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미지로 우리 상상을 채운다.”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신화를 숭배하지 않는 시대다. 더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위한 신전을 짓지 않는 시대다. 그렇다고 종교가 옳다는 것이 아니며, 중세에 추구하던 가치가 진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실에서 닿을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알면서도, 설령 보이는 부분일 뿐이라도 (그것이 가식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이상을 그리고 계속해서 추구하려는 태도,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이상은 달성해야만 그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닿을 수 없기에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주의가 현실주의보다 나은가.

     

 이 두 가지는 사실 양분되지 않는다.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필요조건에 가깝다.

 현실적인 생존이 보장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어렵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상주의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때로는 누구보다 현실적인 면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이상 없는 현실은 나아갈 방향을 잃는다. 돈을 모으는 이들에게 이렇게 돈을 모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등을 꼽는다고 한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사람은 누구보다 이상을 갈망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이상주의일 때보다 현실주의로 살아가는 시간이 더 많은 인간이다. 실용성과 효율을 중시한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의 신전을 완벽하게 건축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살 집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완벽한 신전을 짓는 건 불가능 할지라도, 삶을 살아가는 동안 현실의 벽돌을 하나씩 옮겨 신전을 쌓는 걸 멈추지 않을 수는 있다. 우리는 신전을 짓지 않는 시시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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