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 없잖아?
유럽 여행을 앞두고 여행용 변압기를 구매해야했다. 그래서 출근길에 어떤 변압기가 좋은지 열심히 찾고 있었다. 나는 이미 주말에 다이소에서 파는 변압기를 구매할 것인지 인터넷에서 좀 더 좋은 변압기를 구매할 것인지를 1차적으로 고민을 한 상태였고, 좀 더 좋은 변압기를 구매하기로 한 뒤 여행 유튜버의 영상에서 우연히 본 변압기를 구매하기 위해 사이트를 들어갔으나 거의 3만원이나 하는 변압기에 후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3만원이나 내고 그 변압기를 구매하기가 꺼려졌다. 꽤 유명한 브랜드인데도 후기가 하나도 없는 것이 이상하여 다시 검색하다가 다른 사이트를 발견했고 거기에는 동일한 제품의 후기가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앞뒤 보지 않고 바로 결제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미 여행을 위해 준비해야하는 (숙소라던가, 투어라던가) 여러가지를 선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였다면 나는 고작 변압기라도 나의 3만원을 가치있게 쓰기위해 여러가지의 변압기 선택지를 놓고 비교해보고, 후기를 6페이지, 7페이지까지 넘겨가며 찾아봤을 것이다. 오늘 나의 결정이 이렇게 빠를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 그렇게 오래 고민할 물리적 시간 자체가 없고 (여행 전에 배송을 받아야한다), 그렇게 오래 고민할 에너지가 없었다.
누구나 인생에 가장 방점을 두는 가치관이 하나씩 있을터인데, 누구에게는 그것이 '현재를 즐기자!'일수도 있고, '남부럽게 성공하자!'일수도 있으며, '최대한 누워있자!'일수도 있다. 내게는 그것이 아마 '모든 순간 가장 효율적으로 살자!'일 것 같다. 나는 내가 할애하는 자원에 그만한 가치가 매겨지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학생 때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시간을 좋아했던 이유는 내 시간을 돈으로 치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유시간에 TV를 보거나 누워있는 건 자원 낭비라고 느껴졌고, 이를 돈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계산적으로 보일지라도 이는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되었는데 내게 인간관계의 가장 큰 목적과 이유는 재밌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내게 그런 시간을 주지 못하는 관계는 굳이 이어나가지 않았다. (나의 인간관계의 목적이 즐거움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학연과 지연일지라도 재미가 없으면 굳이 이어나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구두쇠라거나 작은 돈으로 큰 행복을 바란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 자원 대비 얻는 즐거움이 같거나 클 때 쉽게 내 자원을 할애하는 사람이었으므로 큰 돈은 쓰기 전에 오래 고민하지만 작은 돈은 쉽게 쓰는 편이었고, 내가 정말 큰 가치를 두고 있는 취미생활(도서 구매나 공연)에는 가격을 신경쓰지 않고 투자하는 편이었으며, 같이 있을 때 언제나 즐겁고 위로가 되는 인연에는 내가 가진 것 모두를 퍼다주는 사람이었다.
가장 큰 효율을 찾는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내 인생에 실패를 들이기 싫다는 뜻일수도 있다. 나는 내가 기대한만큼의 만족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자원 낭비라고 보았고 항상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투자해야하는 자원이 클수록 많이 찾아보고, 오래 고민하고, 선택을 주저하곤 했다. 때로 그 과정에서 지쳐버려 애초에 내가 얻으려 한 것을 포기하는 상황도 있었다. 이왕 큰 돈 들여 가는 여행 계획을 만족스럽게 짤 수 없을 것 같아 여행을 취소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많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 옷이나 가방, 신발을 구매하기를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내게 일본이나 동남아, 미국이나 호주와 같이 한 국가 혹은 한 도시에서만 여행하는 곳이 아닌 여러 국가를 이동하면서 여행하는 유럽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여행에 이런 단어를 붙여도 되는지 모르겠다...) 숙소나 국가 간 이동수단 등 결정해야하는 것이 내가 방문하는 국가에 따라 배수로 늘어났고, 숙소 하나를 결정하는데에도 예약 어플의 모든 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나로서는 이미 그 과정에서 여러번 나가떨어지곤 하였다.
그러면 마치 정-반-합처럼 다음과 같은 과정을 항상 겪게 된다.
1. 이미 보자마자 마음이 간 숙소가 있음에도 모든 숙소의 후기를 계속 찾아본다.
2. 힘들어서 내일 더 찾아보기로 한다.
3. 그 다음날, 일주일뒤, 이주일뒤 계속 틈틈이 찾아본다.
4. 지치기 시작한다. 한 이주동안 회피한다.
5. 갑자기 화가 난다. 어차피 해야하는데 뭘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나 싶다.
6. 그냥 어느날 갑자기 어플을 열고 아무생각 없이 처음에 마음이 간 숙소를 예약한다.
보통 큰 돈이 나가거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큰 결정을 해야할 때 나의 선택 절차이며, 이에 따라 나는 결정에도 시간이 굉장히 오래듦과 동시에 에너지도 굉장히 고갈되는 편이다.
아마 나는 고작 변압기에 3만원을 투자하는 것이 내가 얻는 이득 대비 큰 자원을 투자한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검증된 많은 리뷰와 같이 내가 받게 될 이득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필요했기에 리뷰가 없었던 순간 구매하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구매를 진행하고 남은 출근길에 SNS 서핑을 하다가 누군가 샤이니 종현이 한때 라디오에서 했던 말을 정리해 둔 글에서 '지구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 없잖아?'라는 문구를 봤고, 그 말이 방금 전까지 선택의 바위 밑에 깔려있었던 나를 꺼내주었다. 고작 변압기였다. 내가 이 변압기를 3만원을 내고 구매한다고 한들 지구가 터져버리는 것도 아니며, 인류의 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3만원을 내고 거지같은 변압기를 구매하게 된다면 나는 그저 치킨을 한번 참아야 할 것이고, 유럽 현지에서 급하게 변압기를 파는 곳을 찾아헤매게 될 것이고, 또 거기서 한 1-2만원을 쓰게 되겠지. 고작 그뿐이다. 그리고 사실 두번째, 세번째 일은 일어날 확률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고, 고작 첫번째 일이나 일어나겠지. 내 선택의 무게는 고작 그뿐이다.
섬세하고 예민하고, 고민이 많은 내가 나를 살린 순간도 분명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렇게 집요하게 숙소를 찾는 나는 그동안의 여행 중에서 숙소를 실패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모든 선택의 순간에 오래 고민하고 생각하는 탓에 그에 따른 결과도 잘 기억하는 편인데, 근 30년을 그런 식으로 빅데이터를 쌓아오다보니 이젠 어느정도 대충 보고도 내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감이 오는 편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게 내 인생에 큰 어려움이나 실패를 없게 만들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매번 크던 작던 모든 일에 돌 다리를 두드려보다 못해 아예 그 돌다리를 해부하면서 살아가다보니 이제는 내게 필요한 것이 그냥 넘어져보기도 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대충 두드려보고 밟아보았는데 돌다리가 무너졌을 때, 이대로 끝이구나 싶을때도 무너진 돌들 안에서 그나마 단단한 애들을 밟고 다시 서보는 경험을 해봐야, 그렇게 무너진다고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내가 좀 더 무모해지고 과감해질 수 있지 않을까. 변압기 그까짓 것 3만원만큼의 가치가 없는 제품일지라도 고장만 안나면 치킨 한번만 참으면 되고, 혹시 고장나면 새로 사면 될 것이다. 유럽도 사람 사는데니까. 마음 먹은대로 쉽게 되지 않을 거란걸 알지만, 새해를 앞두고 작은 다짐을 해보자면 내년의 나는 실패를 감수해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하는 실패란, 고작 치킨 한번 참는 정도일테니까.
ㄴ지구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 없잖아?지구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