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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마이크 May 08. 2023

이 기름집은 전쟁터였어요

25년차 시장기름집 사장님 인터뷰

참기름만큼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감초 역할이 또 있을까. 비빔밥에 넣으면 밥알이 고슬고슬 살아나고, 비빔국수에 넣으면 매콤함을 싹 감싸 맛의 조화를 이뤘다. 한 스푼 넣으면 신기하게 반경 1m까지 고소한 향이 진하게 풍겨 오는 것이 그 자체로 먹진 않지만 마지막에 등장해 완성도에 기여했다.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며 고소한 품위를 잃지 않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사장님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역시 출처 모를 소주병에 담긴 기름을 그저 감사히 먹었던 지난 과거처럼 입소문을 통해 사장님을 익산 중앙시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오랜 궁금증을 해결하는 기쁨을 나에게 준 사장님의 이름은 임경숙이다. 그녀는 1958년생으로 중앙시장에서 20년 동안 일했다. 그 전엔 그녀의 언니 임경애가, 그 전엔 임경애의 시어머니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 1947년 중앙시장이 개장된 시기부터 한 곳을 지킨 셈이다. 호랑이 선생님인 언니에게 기름 짜는 방법을 배우는 데 만해도 5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녀가 고된 시간을 거처 지금의 숙련됨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했다. 


2022년의 진한 여름, 우리는 중앙시장 2층 ‘시장기름집’에서 만났다. 가게를 가득 채운 열기와 깡깡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들으며 사장님과 인사를 나눴다. 그녀가 오전 일과를 마무리하길 기다렸다가 늦은 오후 고소한 기름 향을 맡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화가 끝날 쯤 단골 손님이 놀러와 자연스레 둘러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임경숙: 근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대.


-시장에서 유명하시더라고요. 근처 수선집 사장님이 알려줬어요. 


임경숙: 여기는 종종 인터뷰하러 찾아와. (비닐에 싸놓은 명패를 꺼내 보여주며) 이것도 오래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익산 시민의 날 준거에요.


-상을 꽁꽁 숨겨놓으셨네요.


임경숙: 상품이 없어서 그래.


-아, 패만 줬군요. (웃음) 오전 일과는 잘 마무리하셨나요? 무척 바빠 보였어요. 


임경숙 : 오전에는 전날 주문받은 물량을 먼저 빼야 해서 정신없는 편이지. 찾아오는 손님들도 꽤 있는 편이고. 


-기름을 화구에 직접 볶으시더라고요. 무척 더울 것 같아요. 아까 잠시 있었는데도 땀이 엄청 났거든요.


임경숙 : 여름엔 말도 못하게 더운데 최근에 에어컨 시설을 해놔서 괜찮아요. 선풍기만 있을 땐 무지 더웠죠. 이게 옛날처럼 석유로 볶는 방식이라 불 앞에 일하는 게 불가피해요. 


-뜨거움과 맞서 싸우는 것도 일과 중에 하나겠어요. 


임경숙 : 그래서 출근하면 작업복으로 갈아입어요. 이런 몸빼로. 시워하고 편한 옷 위주로 입어요. 


-주로 몇 시에 출근하시나요? 하루 일과가 궁금해요.


임경숙 : 보통 오전 9시까지 출근해서 5시까지 가게를 열어요. 옷을 갈아입었으면 어제 주문 들어온 거 먼저 확인해요. 단체 주문도 종종 있는 편이고. 전날 주문을 마무리할 즘 이제 손님 오는 대로 그때그때 내려줘요.]


-오전에 함께 계셨던 분은 남편이신가요?


임경숙 : 그쵸, 요즘에 남편 하는 일이 잘 안돼서 오전에 조금 도와줘요. 오전에는 같이 하고 오후에는 다른 일 하는 거죠. 


-사장님 전에 이야기 나눌 때 결혼하기 전에 인기 많으셨다고요.


임경숙 : 그때는 그냥 한 소리고 지금은 인터뷰해야 하니까 말 못하지. (웃음) 나는 결혼을 일찍 했어. 25살에. 근데 천천히 하는 게 좋은 거 같아. 


-저는 결혼 늦게 하고 싶거든요. 한 마흔쯤?


임경숙 : (...)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임경숙 : 많이 경험해보는 건 좋지. 나는 우리 딸들한테도 그래. 많이 만나보고 천천히 하라고. 



-명심할게요. 제가 종종 왔지만 올 때마다 손님이 많아요. 여전히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임경숙 : 기름 맛이지. 볶는 데서 맛을 좌지우지하는 거라 고르게 잘 볶아야 맛있어요. 볶는 데서 맛을 내니까. 정성 들여서 볶아야 해요. 대충 볶으면 맛이 안 나거든.


-정성 들여 볶는다라.


임경숙 : 기름은 한 번 짜면 오래 먹잖아요. 어떤 분들은 1년 드시는 분도 있어요. 그러니까 잘 볶아야 해요. 불을 너무 세게 해도 안 되고, 너무 약해도 안 돼요. 꼼꼼하고 꾸준하게 볶아야 해요.


-50년 넘게 이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언니에게 가게를 물려받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임경숙 : 사실 내가 할 생각이 없었는데 예전에 언니가 가게를 운영할 때 시장에 불이 난 적이 있어요. 그때 언니 나이가 65세 정도였는데 안 좋은 일이 생기니까 자식들이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접으려고 하는데 언니가 내가 하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언니 생각에 내가 하면 가게를 살려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해서 들어오게 됐어요. 


-언니분이 선구안이 있었나 봐요. 


임경숙 : 물려받을 사람이 필요했었죠. 계속 오는 손님이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조금씩 배웠어요. 주로 깨를 볶는 데 불 조절 기술을 가르쳐줬는데 이 기술이 예민한 부분이 많거든. 꼼꼼하게 배우느라 5년이나 걸렸네요.


-중요하게 가르친 부분도 있었나요?


임경숙 : 처음엔 힘에 부치니까 전쟁터에 온 기분이더라고. 대충하고 싶은 날도 있었는데 항상 장사하는 건 정직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정직하게 장사하는 방법을 익혔어요. 


-그 과정을 거쳐 지금의 기술을 얻으신 거군요. 참기름을 만드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임경숙 : 먼저 깨를 깨끗이 씻어서 석유 불에 은은하게 볶아요. 잘 볶아진 참깨를 널어서 식혀주죠. 이 과정에서 볶아지면서 발생한 유해 물질이 어느 정도 날아가요. 뜨거운 채로 압착하면 유해물이 기름 속으로 스며들게 되거든.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깨를 천천히 식혀주는 거에요.


-깨를 잘 식혀주는 일도 볶는 일만큼 중요하군요. 


임경숙 : 맞아요. 이제 어느 정도 식혀진 깨를 기름틀에 넣고 압착해요. 여기 입구 보이죠? 여기서 기름이 나오는 거에요. 고소한 향기가 나죠. 여기서 끝이 아니고 한 번 짜진 깨를 꺼내서 확인해요.


-잘 짜졌나 확인하는 건가요?


임경숙 : 보통 한번 짜면 깨가 뭉쳐지지 않고 흩어지거든요. 깨에서 기름이 다 짜지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그럼 깨를 스팀으로 살짝 쪄줘요.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압착 해주는 거죠. 보통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많은 기름이 나와요. 저희는 두 번까지만 짜요. 그래야 신선한 기름 맛을 유지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병에 잘 담으면 돼요. 그럼 완성이지. 


-기름 한 병을 얻는데 정말 많은 기다림과 노고가 필요하네요. 


임경숙 : 한 병 나오는데 20분 정도? 이렇게 설명해서 그렇지 하다 보면 금방 짜요. 대신 그동안은 집중해서 일해야 해요. 안 그럼 맛이 없거든. 처음에는 불을 약하게 놔서 은은하게 볶다가, 말릴 때는 또 불을 줄여요. 다시 볶을 땐 불을 쎄게 놓고 빠르게 볶죠. 마지막으로 다시 불을 천천히 줄여서 계속 볶아요. 뭉근하게. 깨 안쪽까지 열기가 잘 전달되도록.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볶아서 그런지 올 때마다 손님이 많아요. 


임경숙 : 여기가 시장 2층에서 단골손님이 제일 많아요. 우리 집은 기본 30년이고, 20년이고 그래요. 어떤 손님은 22살에 시집와서 지금 85살 잡수셨다고 하더라고. 언니 때부터 단골손님인 거죠.


-그러면 손님이 아니라 친구일 것 같아요. 


임경숙 : 그쵸. 때로는 친구고 때로는 엄마같이. 


-친구처럼 엄마처럼 좋네요. 그럼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을까요?


임경숙 : 여기 손님들이 다 오래된 분들이라 가족사까지 다 알아요. 자녀가 몇 명이다, 이번에 시집을 가고, 뭐 손주도 낳고.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돼요. 오랜만에 와도 자녀분 애기 낳았어요? 하고 물어보고. 소소한 이야길 자연스럽게 나누죠.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일을 오래 하는 마음이 궁금해요.


임경숙 : 사실 처음에는 이 일이 지치고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근데 한 해가 갈수록 일에 대한 애착도 생기고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일을 안 할 땐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지?’그랬는데 지금은 감사해. 하루하루 즐겁고. 해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해요. 새로운 마음으로 꾸준하게 볶아요. 그럼 행복해. 



한 시간을 약속한 인터뷰는 두 시간을 넘겨 끝났다. 20년 동안 매일 빠지지 않고 같은 일을 반복해온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지혜와 에너지는 답변을 곱씹어보게 만들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불 앞에서 일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묵묵히 자신만의 일을 좇아 시간을 쏟아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중요한 게 생각났다. 아차. 깜박하고 참기름을 안 사왔다. 이 핑계로 조만간 사장님을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 


글. 로잇스페이스

사진. 이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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