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00
7시간이 넘게 취재를 진행하고 나니 조금은 지친 것 같은 검은 머리와 갈색 머리 여자는, 다시 택시를 타고 중앙시장 앞 카페로 갔다. 지금 그들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뿐이다. 그래도 돌아다니면서 아침에 얻은 떡을 야금야금 먹은 덕에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은 듯하다. 아아를 쭉 들이킨 뒤 검은 가죽 의자에 눕다시피 기대어 오늘의 일이 어떤 결과물로 나올까 상상한다. 너무 깊은 상상에 취한 나머지 검은 머리 여자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이를 안쓰럽게 본 동료는 잠시 엎드려 편하게 자라고 말해준다. 집이 멀어 한 시간이나 일찍 나온 동료에 대한 측은지심이었고, 그 순간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배려였다. 그녀는 카페인이 가득한 아아를 한 입 쭉 들이키고, 노트북을 연다. 당장의 수입을 위한 영상 편집 아르바이트 작업물을 켠다. 동료와 같이 꿈에 취해버리고 싶은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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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00
중앙시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입구에선 꽃집 사장님이 화초에 물을 주고 있다. 그 덕에 중앙시장 입구는 요즘 트렌드라는 플랜테리어(식물을 뜻하는 Plant와 인테리어 Interior의 합성어)의 모습을 하게 됐다. 남향인 중앙시장 입구에 늘어선 푸른 식물이 긴 호수에서 나오는 물줄기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예전에는 더운 여름을 참 안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짙은 초록 이파리와 뜨거운 햇살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간간이 살랑이는 바람에 조금의 움직임을 허락하는 초록 잎사귀들, 그 아래로 만들어지는 작은 쉼터, 어렸을 적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매미 울음소리, 뜨거우나 아름답고 강렬한 햇볕. 하나도 움츠러들지 않고, 모든 게 왕성하게 일어나는 시기. 한여름이면 힘이 생기는 식물처럼, 나도 힘을 채워 무언가를 돋아내고 싶다. 솟아나라, 피어나라, 전통시장 콘텐츠여.
-오후 4:00
시장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먹거리, 특히 간식거리다. 중앙시장에는 딱 한 개의 호떡집, 매일호떡이 있다. 이 호떡집은 갓길로 통하는 출입구 바로 옆에 있어 길목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겨울엔 찬 바람을 막을 길이 없고, 여름엔 뜨거운 햇빛을 온전히 견뎌내야 한다. 사장님은 “추워도 할 수 없고, 더워도 할 수 없고. 집 없는 장사가 그런 거지 뭐.”했다. 그녀는 익산으로 시집온 40년 전부터 계속 중앙시장에서 장사했다. 처음 25년은 야채나 분식 등 여러 가지를 팔다가, 15년 전부터는 호떡만 파는 중이다. 어떻게 40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켰냐는 물음에 “시장 나와서 장사하다 보면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라. 재밌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40년 동안이나 이 길목의 바람과 햇살을 모두 지나 보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사장님이 단단한 나무처럼 느껴졌다. 마을 한쪽에서 묵묵히 줄기를 내고, 잎사귀를 틔우고, 열매를 맺고, 찬바람을 견뎌내길 반복하는 보통의 나무. 대단한 주목을 받진 않지만,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나무.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적어 전달할 수 있는 이 일이 좋다고, 그래서 피곤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는 얼그레이 초코케이크보다, 잠깐의 낮잠보다도 더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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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00
“아이고 기자 아가씨들 또 왔네! 시장 사람들을 아예 다 만날 생각인 거여?”
시장 입구에서 매일청과라는 과일 가게를 운영하는 그가 중부지방 특유의 늘어지는 말투로 말을 건넸다. 입구에 계시다 보니 우리가 자주 들락날락하는 걸 모두 보셨을 테지.
“다 뵐 수만 있다면 너무 좋죠. 사장님은 이제 곧 퇴근하시려고요?”
“6시쯤 집에 들어가야지. 저녁 먹어야 할 거 아녀.”
말이 끝나기 딸에게 전화를 걸어 찜닭을 먹고 싶다고, 모현동에 어디 어디 찜닭이며 매운맛이어야 한다고, 이따 퇴근하고 먹을 거라고 하며 통화를 끊었다.
“이따 따님이랑 찜닭 드시려 나보네요.”
“아녀, 딸은 서울 산당께.”
“전화로 따님한테 찜닭 먹자고 한 거 아니셨어요?”
“이잉, 핸드폰 인터넷으로 찜닭 배달시켜달라고 한 것이여.”
엄청나다. 배달 음식 앱 하나로 서울에 있는 딸은 익산에 사는 아버지를 위해 몇 번의 클릭만으로 찜닭을 주문해줄 수 있고, 심지어는 결제까지 미리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이용한 것이었다니. 나는 어쩐지 이 풍경이 너무나 신기했다. 배달 음식 앱은 나 자신을 위해서만 쓰는 것이 아니었는가…. 나는 또 작아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려는데 사장님이 다급하게 자두 몇 개를 손에 쥐여주셨다. 집사람이 보면 내가 맨날 다 퍼주는 줄 알 테니 얼른 집어넣으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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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00
오늘의 마지막 일정, 저녁 시간의 시장 모습 관찰이다. 슬슬 문을 닫기 시작하는 시장의 분위기와는 달리 저녁 시간에 가장 분주한 곳이 있다. 빈대떡집이다. 타닥타닥, 철판 위에 반죽을 보고 ‘거의 튀기는 수준인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곳은 확신컨대 맛집이다.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는데 밀가루야 말해 무엇할까. 이런 기준에서 우리가 들어온 영주네 빈대떡은 맛집이 분명하다. 촤라라라, 지글지글, 기름 튀는 소리. 그래 이거다! 내가 먹고 싶었던 것…. 아니, 저녁 시간에 취재하고자 했던 것.
튀겨지는 전의 모습을 한껏 구경하고 한 점 먹기 위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일동 모두가 우릴 쳐다본다. 그들의 눈빛을 읽어버렸다. ‘뭐여, 여긴 무슨 볼일이야?’
어쭙잖게라도 웃어 보였으나 어차피 마스크 때문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재빨리 한 마디 던져본다. “마침 자리가 없네…? 다른 데서 먹어야겠다….”
우린 다시 밖으로 나가 가게 앞에서 전을 튀기는 사장님과 대화를 시도했다.
‘여긴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이 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합니다.’, 등등 여러 질문을 던졌지만, 사장님은 어색해하시며 대부분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 하셨다. 그래, 웃음인 게 어디냐, 오늘 취재는 이 정도면 선방했다, 하며 슬슬 일어났다.
-오후 7:00
5, 4, 3, 2, 1…! 7시다! 12시간이 되었다! 어떻습니까, 에디터. 소회를 밝혀보시죠.
“12시간쯤이야. 후후.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비를 많이 맞아 저의 소니 카메라가 조금 걱정되는 것 말고는 다 즐거웠어요. 너무 뻔한 답변인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또 뻔한 말을 추가하자면, 오늘도 역시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혼자 어떻게 12시간 동안 시장 취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거예요. 역시 덕질도 함께여야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혹여 제가 나중에 ‘나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어. 이까짓 회사 정도야.’ 라거나 ‘네가 한 게 뭐 있어!’ 하는 자만과 오만에 빠져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오늘을 상기시켜주세요. 사람은 자꾸 과거를 잊고, 자기 위주로 미화시키고, 결국 오만해지는 것 같거든요. 오만은 모든 것을 망치고요. ‘오만과 편견’이라는 명작도 있지 않습니까. 아, 말이 길었습니다. 결론은 즐거웠고, 함께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상인분들께서 반갑게 맞아주셔서 기쁘게 활보하고 다녔던 거 같아요. 아무래도 저희가 크게 인사하고, 이것저것 질문도 하니까 예쁘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역시 친해지는 데는 큰 인사와 부담스럽지 않은 관심이 최고의 방법인가 봅니다. 그 덕에 저는 오늘 여기 상인 분들과 또 하나의 관계를 맺은 것 같아요. 이젠 과일 살 일이 있으면 매일청과를 가고, 김치 살 일이 있으면 영광김치를 오겠죠. 이런 관계가 형성되면서 공동체를 느끼고, 나아가 지역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세상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걸 배웠어요. 특히 아까 오일장은 새벽같이 가서 자리도 펴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저녁 되면 또다시 다 철수하잖아요. 정말 이게 보통 일이 아닐 것 같단 말이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 정말 많고, 나는 그걸 조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의지를 다시 다졌고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저도 뻔한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글. 로잇스페이스
사진. 로잇스페이스, 이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