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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면

by 고승환 Mar 22. 2025

나이키코리아의 인재채용팀 인턴을 지원할 때 지원서 3종 세트라 불리는 이력서, 자기소개서, 경력기술서를 영문으로 준비한 적이 있다. 국문 이력서를 영문으로 옮겨 적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경력기술서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는 업계 용어를 번역하며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문제는 자기소개서였다. 다른 언어로는 흉내 낼 수 없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걸림돌이 되었다.


채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프로세스 이탈자와 불합격 통지자들에게 안내되는 이메일 템플릿을 제작하고 다듬으며 혹여 지원자분들이 섭섭한 마음에 낙담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기억이 납니다.


위 문장은 불합격자의 채용 경험이 기업 이미지와 고객 전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나의 고민을 자기소개서에 담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섭섭한 마음을 영어로 옮길 때 발생했다.


만능 파파고 씨와 구글 번역기는 「disappointment」로, Chat-GPT는 「upset」으로 영역했다. GPT에게 쓴소리 한마디 하고 다시 시키니 「feel let down」으로 영역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번역은 셋 다 틀렸다.


먼저 세 가지 모두 품사가 변형되며 「마음」이라는 핵심이 증발해 버렸다. 내가 사용한 「섭섭한 마음」이라는 명사절은 영역본에서 「upset」이라는 동사로 변질되었다. 「feel let down」과 「disappointment」는 명사(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결국 마음이라는 본질이 사라져 버린 것은 매한가지였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섭섭함을 정확히 담아낼 영단어의 부재였다. 섭섭하다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세 가지 얼굴이 보인다.


1. 서운하고 아쉽다.

2. 없어지는 것이 애틋하고 아깝다.

3. 기대에 어그러져 마음이 서운하고 불만스럽다.


「upset」은 분노의 색채가 스며든 감정이어서 애초부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채용팀에 있으면서 지원자에게 분노를 유발했다는 일말의 뉘앙스도 풍기고 싶지 않았다. 남은 선택지인 「feel let down」과 「disappointment」를 살펴보자. 이 둘은 의미론적으로 비슷한 풍경을 그리는 단어들이다. 「disappoint」의 뜻을 찾아보면 실망시키다, 실망을 안겨주다, 좌절시키다로 정의된다. 섭섭하다의 세 번째 의미와 유사해 보일 수 있고 「feel let down」 역시 기분을 떨어트리다, 즉 실망을 안겨주다로 이해되니 얼핏 적절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의 골짜기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섭섭하다」는 실망의 감정을 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실망 이후에 피어나는 감정이다. 「너에게 실망했어」라고 말한다면 화자는 발화 직전에 상대로부터 실망이라는 감정의 씨앗을 심었고 그 원인은 발화 시점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반면 「너에게 섭섭해」라고 말한다면 화자는 발화 직전에 섭섭함이라는 감정을 느꼈지만 그 뿌리가 되는 실망은 이미 과거의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망했어」의 응답에는 이유나 변명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섭섭했어」의 응답에는 이유나 변명에 앞서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 섭섭함은 실망보다 더 감정적이고 관계의 실타래를 더 많이 엮고 있다.


섭섭함에는 애정이 있고 실망은 그렇지 않다. 만약 누군가 시간이 흐른 일에 대해 「섭섭했어」 대신 「실망했어」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실망은 했지만 애정이 부족해 섭섭함이라는 더 깊은 감정의 호수로 흘러들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문제의 매듭을 푸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마음처럼 발화 시점에 따라 선택해야 하는 단어도 달라지는 것이다.


영어에는 왜 섭섭함이 없을까. 이는 언어의 우열을 가리는 어휘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역사적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서구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실망이라는 개인적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관계주의 문화인 한국에서는 섭섭이라는 상호적 감정이 발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적으로 영미권 문화는 계약과 권리에 기반한 사회 구조를 발전시켰고 이에 따라 약속 불이행에 대한 실망이라는 감정이 중요했다. 반면 한국 사회는 정과 같은 비언어적이고 암묵적인 유대에 기반한 관계가 중시되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관계적 허탈함을 표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영어권 사람들이 섭섭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감정을 「disappointment」, 「feel let down」 「upset」 등으로 분절하여 표현하고 그 과정에서 섭섭함이 가진 독특한 뉘앙스가 희석된다. 결국 언어적 표현 수단의 부재는 감정 인식 자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국어라는 성벽 안에 갇힌 영혼들 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라는 틀 속에서 형성되고 감정은 언어라는 그물에 담긴다. 섭섭함이라는 한국어의 정교한 감정은 영어의 세계에서는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그것은 색깔을 볼 수 없는 세계에서 무지개를 설명하려는 시도와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 인식의 한계라고 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어로 생각하는 나와 영어로 생각하는 나는 단지 다른 표현 방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다른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 수 도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 역시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이 느끼고 표현하는 고유한 감정들을 모른 채 살아왔을 것이다. 핀란드어 단어 중에 「sisu」라는 단어가 있다. 핀란드어로는 네 개의 알파벳과 두 개의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 하나로 설명되는 이것을 한국어로 표현하려면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내적 결단력」이라는 긴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 이 감정은 내 언어의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미지의 영토이다. 내가 핀란드어를 배우지 않는 한 이 감정의 풍경을 온전히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쯤 당부하고 싶은 것은 언어적 겸손과 인정이다. 번역 불가능성은 언어적 한계의 증거이자 동시에 언어적 풍요로움의 증거다. 섭섭함이 영어로 온전히 번역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한국어만이 가진 고유한 서정성과 관계적 민감성을 보여준다. 번역은 한 언어가 다른 언어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는 말마따나 번역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틈새는 각 언어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창이 된다. 우리가 번역 불가능성에 좌절하는 대신 이를 문화적 다양성의 소중한 증거로 받아들인다면 언어 간의 차이는 한계가 아닌 풍요로움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언어적 세계관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다른 언어들이 열어주는 다양한 인식의 창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영어에 섭섭함이 없다고 해서 영어가 열등한 것이 아니듯 한국어에 「sisu」의 정확한 대응어가 없다고 해서 한국어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번역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언어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진정한 대화의 장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언어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면, 언어의 습득은 정신적 해방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다른 언어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인식에 부과된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어라는 감옥의 열쇠는 언어 자체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결국 나는 자기소개서에서 섭섭한 마음을 「disappointment」로 번역했고 지원 결과는 서류 탈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험은 내게 실제 섭섭함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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