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형외과 레지던트다.
아침 의국 회의.
3년 차 선배가 어젯밤 동안 응급실로 내원했던 환자들을 교수님들께 보고하던 중이었다.
집중력을 잃은 나는 몰래 핸드폰을 열고 어제 여자친구가 보낸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이젠 진짜 그만하자.]
씁쓸한 감정이 밀려 올라오려는 찰나,
선배가 마지막 환자에 대해 발표하는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47세 남자 환자, 전일 축구하다 상대방과 부딪히며 수상. 우측 경골 간부 재골절 진단 하 응급실 통해 입원하였습니다. 전에 이미 같은 부위를 OOO교수님께 2차례 수술받았던 분으로….”
재골절이란, 말 그대로 골절이 다시 발생했다는 의미이다.
적절하게 치료된 골절이 유합(Union, 뼈가 붙는 것)되는 데는 보통 수개월이 걸린다.
뼈가 제대로 붙기 전에는 언제든지 다시 부러질 위험이 있다.
그러니 환자는 골절 부위에 외부 충격이 가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제일 최근 수술은 3달 전으로….”
위 환자는 골절이 다 낫기도 전에 축구를 하다 또 다친 것이다. (그것도 2차례나)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과신한 것이다.
“발표자, 너 같으면 어떻게 치료할래?”
교수님의 기습적인 질문에 선배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유합 가능성이 있어 고정술과 더불어 골이식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한번 골절되었던 부위가 반복적으로 골절되면,
재생 능력이 저하되다가 결국 치유 능력을 아예 상실할 수 있다.
즉, 유합이 되지 않는 상태인 불유합(Nonunion, 뼈가 붙지 않는 것)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 일반적인 골절 수술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들(골이식 등)로 치료를 시도해야 한다.
“쯧, 넘어가.”
답변이 탐탁지 않았나.
교수님이 혀를 차며 미간을 구겼다.
잘 말한 것 같은데 뭔가 부족했나 보다.
선배가 얼굴을 붉히며 보고를 이어가려던 중,
나는 내 핸드폰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젠 진짜 그만하자.]
‘이젠 진짜’라….
마침표 뒤에 ‘지긋지긋해’라는 말이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겠지.
쓰이지 못한 온갖 단어들이 나를 노려보며 손가락질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서로가 첫 연애였다.
서로가 처음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어렸기 때문일까,
우리는 감정적이고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서투른 연애를 했었다.
맺음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시작은 쉽게 받아들였으면서 끝은 그러지 못했다.
오래전 서로에게 식은 게 분명했는데도 현실을 부정하며 서로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지고 만나길 반복하며 수년을 끌다가 결국 어제 마무리된 것이다.
이전의 헤어짐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이번에는 정말 끝이라는 걸 직감했다.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내 우주에서 더 이상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사람의 우주에도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영혼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여러 감정과 기억들이 구멍을 통해 내 안을 드나들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대게 미안함이다.
미성숙했던 것.
남자답지 못했던 것.
바쁘다는 핑계로 맺음까지 떠넘겨버린 것.
셀 수 없이 많은 죄목들이 영혼에 새겨지는 듯하다.
전 연인의 행복을 바라는 이유는,
사랑해서가 아니라 미안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였다.
“박인수!”
날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교수님들, 레지던트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과장님이 소리쳤다.
“너 뭘 멍 때리고 있어! 어제 외래로 왔던 환자 영상 띄우라고!”
그제야 난 내면의 세계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
지금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지.
또 어떻게든 하루를 버텨내야지.
그 사람도 그 사람의 우주에서 어떻게든 이겨내고 있겠지.
지지 말아야지.
나는 힘차게 대답하며 컴퓨터로 달려갔다.
“네! 과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