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왕자
그마저도 채식주의자를 쓴 작가가 남자일 때를 가정하면 과연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사뭇 흥미로워집니다. 라고 어느 단톡방에 답하려다 말았다. 역시나 미천한 나는 부커상까지도 채 이해하질 못했고, 애꿎은 마광수나 다자이 오사무 생각만 더 났었으니까. 그러니 나로서는 이렇게 발칙한 상상을 하는 수밖에 없다. 글이 늘상 살갑기만 하면 노상 편하게만 느껴지는 탓일까? 한마디로 예술 같지는 않나 보다. 그래, 위대해지려면 약간의 불친절 정도는 으레 감수해야만 한다. 하다못해 독자에게라도 떠넘겨야 한다. 예술이란 모름지기 신비로워야 하는 법. 그럴수록 높은 담벼락을 세워야만 한다. 아무렴 허물없는 친구처럼 지낼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수긍을 강요하듯 윽박지를 수는 없듯이 그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이 저마다의 예술이 아닌가 한다. 솔직히 말해 이미 죽거나 위대해진 다음에 그걸 추앙해 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진짜 그런 안목과 혜안을 가진 자라면 새로운 책 중에서도 그럴 성싶은 옥석을 뽑아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먼 훗날 진정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그날이 오면 그제서야 피차 진짜배기였다는 게 입증되는 거다. 그러니 신간을 칭송하기란 터무니없이 품도 많이 들뿐더러, 자신의 위상에도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든 방향만 정하고 나면, 뒷받침할 만한 근거야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까닭이다.
“기믹(gimmick)은 상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용하는 특이한 전략,
또는 그 전략에 이용되는 독특한 특징을 의미한다.”
아마도 흔한 일은 아닐 테지만, 나를 처음으로 매료시킨 세계문학은 인간 실격이었다. 짜릿하고 통쾌했다. 이렇게 해도 문학이 되는 거구나. 그건 단지 어설픈 기믹으로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시킨 해당 문제작을 끝으로, 그의 삶 또한 불과 서른아홉의 나이에 스스로 완결 짓고야 말았다. 예민한 자의 섬세한 자기혐오가 이토록 유교적인 사회에서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건 참으로 흥미로운 점이다. 방탕한 주인공의 이름이 하필이면 요조라는 것 또한 기묘하기 그지없다.
언제부터였을까? 고상하기만 한 것들은 좀처럼 끌리지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내 눈에는 온통 기믹이다. 우리말로는 관심을 끌기 위한 술책이나 장치 정도가 되겠다. 아무렴 글이야 당연히 좋아야겠지만, 나머지 삶이야말로 무대 장치나 다름없다. 내내 선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없다면 호감을 살 가능성 또한 현저히 줄어들고 말 테니까. 그것이 비록 현생이든 아니든 간에 똑똑한 연출은 여전히 유효하단 뜻이다. 글을 만지는 일이란 무릇 고독 경쟁이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갈수록 표독과의 전쟁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재미있는 말이네. 딱지가 붙었다면 오히려 안전하고 좋지 않니? 방울을 목에 건 새끼 고양이처럼 귀여운 걸. 딱지 없는 불량이 무섭지.” 91p - 사양
“저는 불량한 사람이 좋아요. 더구나 딱지 붙은 불량이 좋아요. 그리고 저도 딱지 붙은 불량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달리 제가 살아갈 방도가 없을 것 같아요.” 92p - 사양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말없이 눈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애처로워지듯이, 어쩌면 자신의 결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다자이 오사무. 가엽게도 정작 그것이 인간 실격을 몸소 사후 출간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던 쓸쓸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자기혐오가 꽃피운 다자이의 문학은 그래서 더 구슬프다.
“나는 열아홉 살 먹은 고교생이었다. 반에서 나 혼자만 두드러지게 호사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20p – 고뇌의 연감
픽션을 설마 다큐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인간 실격을 읽고 나서부터 다자이가 뿔 달린 악마쯤으로 여겨진다면 <마음의 왕자>를 권하고 싶다. 날 때부터 유독 필요 이상으로 부끄럼이 많았던, 인간 다자이의 면모를 한껏 엿볼 수 있는 장면이 그득하다. 딱지 붙은 불량은커녕 언제나 마음의 왕자였던 다자이 오사무. 특히나 “술을 싫어해” 143페이지에 나오는 평온할 때 다자이는 고작 신문과 술 두 되에도 안절부절못할 만큼, 얼마나 인간적이고 보기 드물게 귀여운 어른인지를 운 좋게 나만 훔쳐보는 기분마저 드니까.
책은 어디서든 그 안에 박제돼 버린 작가들과 시공간을 초월한 대화를 가능케 해준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던 요조의 모습이 괜스레 애달프게 느껴지는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이리라. 그들이 남기고 간 막대한 유산 덕분에라도 우리는 다분히 축복받은 세대가 아닌가 싶다. 요조에게는 아니 다자이에게는 그만한 행운이 주어지질 않았으니까. 그럴수록 더욱이 의식적으로라도 신간을 꾸준히 챙겨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