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이 마구 뒤섞여 흐르는 그곳, 파주에 다녀왔다. 인쇄부터 제본, 후가공에 이르기까지, 하필이면 원단을 업으로 하는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본 공정들은, 쓴다는 게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새삼 일깨우고야 말았다. 그래, 뜻대로 되는 공장이 어디 있더냐. 그랬더라면 읽기는커녕 쓸 일은 더욱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쓰는 이들이 무엇보다 앞서 접해 보아야 할 과정이 아닐까 하는 판단에 이르자 돌연 슬퍼지고 말았다.
내 눈에는 자꾸만 옷을 만드는 봉제공장처럼 보여서, 모쪼록 덜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만 더해지더라. 때마침 지구를 살리자는 책은 보이지 않았다는 게 새삼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랬더라면 정말이지 이나마 끄적이고 있는 것도 접어야 했을는지 모른다. 그런 비책이 담긴 거라면 더욱이 사지 말고 빌려서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초판 1쇄는 제외다. 하물며 다자이도 생전에는 이천오백 부밖에 못 찍었다는데, 네가 뭐라고. 불을 지필 것인가, 누를 것인가? 그러니 만에 하나 진정한 작가가 되려거든 덜컥 생각나는 대로 곧장 쓰지도 말고, 느긋하게 좀 묵힐 줄도 알아야만 한다.
아직은 성급한 나머지 좀처럼 제맛을 내지 못하는 어제의 글도 순전히 내 탓인 것처럼, 최소한 그런 생각이라야 쉬이 상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보다 중요한 건 내 책을 더는 사보지 말고, 가급적 빌려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히 급하다시면 내 것이라도 흔쾌히 내어드린다는 자세로,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정히 써야겠거든 오래 입을수록 멋을 더해가는 이를테면 랄프로렌 같은 글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쓰기보다는 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쓰지 못하는 이유는 글재주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처럼 살 줄을 몰라서니까.
그럼에도 못내 작가가 되려거든 비록 글밥은 아니지만 먹고는 있으니, 엄연히 전업은 아닌 거라며 어디까지나 말만 그렇게 하면 된다. 이제는 부러지지도 마를 것 같지도 않은 펜을 부여잡고, 온 마음을 다 쏟는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아마 평생을 도도하게 굴고 싶어서라도 전업 작가가 되지는 못할 테니까. 비단 글뿐이겠니? 넌 분명 아니라며 끝까지 손사래 치겠지만, 어쩌면 은연중의 꿈만이 진짜일지도 모르지.꿈속에서만이라도. 아니, 방금은 얼결에 나온 헛말이라고. 우선은 말만이라도 그렇게 해서, 또다시 나만 속이면 돼.
책을 한 권 낸다는 게 인생을 바꿀 만한 경험은 아니라는 걸, 나만 알고 남들은 영영 몰랐으면 좋겠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안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아마도 없을 테지만, 어쩌면 우리만의 알잘딱깔센이자, 부캐가 존재하는 슬픈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다. 에둘러 써보려 하지만 감춰지지 않는 진실, 그것만이 진짜 진심이니까. 그러니 이제는 애써 눈을 피하려 하지 마라.
최단 거리 322 Kilometer, 꿈과 현실이 마구 뒤섞여 흐르는 강. 그곳에서 나는 바다를 보았고, 펜을 맞잡고 있는 한 우린 결국 바다에 이를 거다. 파주에는 바다가 있다. 넌 분명 손사래 치겠지만 우린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