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의 스트레스가 몰려올 때면 가히 불가능한 꿈을 꾸게 된다. 원하는 만큼만 시간이 훌쩍 지났으면 좋겠다고. 기간은 때마다 다르지만 오늘은 딱 일주일만이어도 좋겠다. 오랜만에 꿈꿔보는 시간여행. 이럴 땐 자꾸만 생각이 나서 마음 편히 읽을 수도 없다. 활자에 박제된 과거는 차라리 편안하다. 살아있는 현재만큼 위험한 건 또 없을 테니까.
나를 되돌아보며 불편한 과거를 떠올리면 아쉬움은 물론 짙게 남겠지만, 다시 돌아간대도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사람과의 관계 같은 거. 나는 아마 지금도 똑같은 선택을 하고 말 테니까. 되돌아가고픈 시점이 없다는 건 어쩌면 이를 잘 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책임이야 어떻게든 지면 그만이니 앞으로도 부디 그랬으면.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고.
실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내가 얼마나 힘겹게 여기까지 왔는데. 과연 아는 것만이 인간의 선택을 좌우하는 걸까?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선택은 또 얼마나 될까? 설령 그것이 오답일지라도 나는 지금도 같은 답을 고를 것만 같은데. 수많은 어휘 중에서 하필이면 선택이라 불리는 이유도 그만한 책임은 응당 예상하고 또 선별했으니 기꺼이 감수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지식? 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결국 선택이란, 하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단 하나의 옵션인지라, 정작 선택적일 수가 없다는 거다. 그럼에도 되돌리고 싶은 선택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건 잘못 택해서가 아니라 혹여 자신을 기만했던 탓이 아닐까. 지금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재회가 불편하지 않으면 잘 살았다는 증거라는데, 회상도 딱 그만큼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돌이켜보면 너무 애처로운 나머지 괴롭기는 하지만, 한 쉰 살쯤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딱 자동으로 돌아가는 게임만큼만, 최소한의 할 일만 수행하며 흘러가 준다면 슬프지만 그것마저 감수할 각오가 나는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돈이 지겹고, 관계가 역겹고, 끝내는 내가 미워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마침내 사람이 싫어졌고, 나는 지금도 상대방의 눈을 예전처럼은 바라보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필요에 의해 다시금 책을 손에 쥘 때도 사람에 대한 희망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그렇게 읽다 보니 책만큼 편안한 과거는 어디에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설령 내가 덜 읽었을지언정 적어도 결말이 바뀔 일은 없었으니까. 난 그저 어른이 되고 싶어서 책을 읽었을 뿐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말하자면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택지에 동그라미를 먼저 그리는 게 아니라, 일말의 주저도 없이 빗금부터 치다 보면 어느덧 섣부른 도전에 선을 긋는 거침없는 사선만이 남는다. 선택은 내가 낳는 것인지 아니면 남겨지는 것인지, 예전엔 내 손에도 선택지가 제법 들려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약을 대로 약아서 도통 기억하려 하질 않는다. 이제는 모질기만 한 가난한 마음, 그러니 원이란 그릴 수 있을 때 하염없이 그리며 버릇처럼 익혀둬야만 한다. 언젠가 다시 그리고자 하는 그날에 원 없이 그려낼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이란 본디 정육면체였을까? 원이 깎여나간 자리에는 모난 원형만이 남아서, 이윽고 둥글게 사는 법마저 잃어버린 것 같다. 어느덧 신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약아빠진 시대, 그 선두에 서 있는 건 슬프지만 나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정해준 내일의 오답을 먼저 외기보다는 저마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은 수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