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Backspace
어쩌면 이야기와 꾼의 영역은 별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여느 분야가 그러하듯 프로의 세계라면 엄연히 달라야 하고, 어떤 문장이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자신조차 태연히 속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서야 진정 꾼이라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내내 포만감 한 번 안겨주지 못할 글밥을 지어먹으려던 것도 아닌데, 실컷 잘 읽다 말고 난데없이 왜 이런 생각이 불쑥 끼어드는 건지.
이제는 귀한 남의 책을 읽으면서도 예전엔 생각지도 못한 의구심이 마구 밀려온다. 초고는 어땠을까? 원래부터 익히 알던 단어였을까? 대체 얼마를 붙들고 있다가 힘겹게 놓아준 글일까? 평소엔 어떤 분일까? 정작 우리 애들이 나한테 서로 고자질을 할 때도 내가 해주는 말은 늘 한결같다. 나는 너희들의 모든 걸 다 알고 싶지는 않아. 더구나 이런 못된 의혹을 감히 예술에다 품어서는 안 되는 건데.
처음부터 작가가 되려 펜을 든 것도 아니고, 긴 시간이 흘러도 흔쾌히 펼쳐볼 수 있는 단 한 권을 원했을 뿐인데, 아무렴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프로가 되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덜컥 또 다른 내가 된다 해도, 나를 그 시간까지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쓰려던 자아는 이미 사라져 버린 후가 될지도 모르는데.
초고를 쓸 때 처음 품고 있던 생각이 예쁠법한 문장 하나에도 현혹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원래 그런 거라고.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이 또한 그러한 대화로 귀결되리란 걸 모르지는 않아도, 글만큼은 조금 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고분고분 지워낼 수도 없다. 프로는 좋지만, 꾼이 되긴 싫어서. 어쩌면 만에 하나라도 글밥을 원하게 될까 봐 그게 더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시소가 얼마나 기울어 있건, 각도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어쩌면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선수급도 아니라는 뜻일 거다. 정작 되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언급 자체가 괜히 껄끄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는 제법 번듯해 보인다고 꼭 나 같은 놈에게 지탄을 받는다 해도, 원래나 다들처럼 해묵은 서두로 변론을 시작하기보다는 그저 군말 없는 나이기를 바랄 뿐이다.
성숙해질 것인가, 숙성시킬 것인가는 곧 적극성을 묻는 언어다.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고가 적당히 익어갈 그때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깨져가면서도 굴하지 않고 다가설 것인가? 피차 더디기는 마찬가지지만, 기다림에 능하지도 않은 타입이라 사실상 선택지도 없다. 둘 중 하나라도 먼저 가속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금처럼 맞서 보는 수밖에. 언젠가는 우리 모두 업자가 될 테지만, 아직은 아니야. 내 손으로 일궈낼 수 없는 모든 건 설령 내 것처럼 느껴져도 내 것이 아니라니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을 곧바로 남기고픈 순간에 당장은 메모할 게 하나도 없어서 곧장 모니터 앞으로 내달리다가, 운 좋게 컴퓨터라도 켜져 있어서 단숨에 기록하는 동안에도 간사한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거다. 좋은 문장 하나 앞에서도 흔들리고 마는 게 인간이니까. 하나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에는 이렇게 별걸 다 궁금해하는 나이지만, 이런 글을 끄적이는 것만으로 스스로 몹시 경계하고 있는 척, 안일한 생각을 품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몸부림이 잦아드는 것. Eternal Backspace, 이 터널의 끝은 어디일까? 이런 고뇌쯤이야 얼마든 반겨줄 테니,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지워내고 비우며 살아가고 싶다. 무한의 백스페이스만이 우리를 구원해 준다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예전 같지 않은 몸부림이 잘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라면, 차라리 막돼먹고 되바라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