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학의 두 갈래
게임 스토리텔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게임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논쟁 중 하나인 루돌로지(Ludology)와 내러톨로지(Narratology) 간의 대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접근법은 게임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현대 게임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24년부터 국민대학교 AI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게임 스토리텔링'과 'XR 디자인'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수업들을 통해 디지털 공간에서 어떠한 주제와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설득과 이해가 아닌 공감을 통해 전달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학생들에게 공유합니다. 지난 '게임 스토리텔링' 수업에서 다룬 내용들을 많은 분들에게도 전달하고자 블로그를 통해 여러 글을 연재합니다. AI가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에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루돌로지는 라틴어 'ludus'(게임)에서 파생된 용어로, 1999년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에 의해 대중화되었다.[1] 루돌로지는 게임을 규칙, 시스템,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이 관점에서 게임의 주요 기능은 '플레이되는 것'이며, 게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게임을 다른 미디어와 구별시키는 독특한 요소라고 본다.
루돌로지는 게임을 규칙 기반의 시뮬레이션으로 간주하며, 게임을 대중을 위한 최초의 시뮬레이션 미디어로 보아 미디어 소비와 생산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2]
게임 메커니즘과 규칙: 게임 메커니즘은 플레이어의 행동을 지배하고 안내하는 규칙이나 루뎀(ludeme)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메커니즘들의 상호작용이 게임의 복잡성과 플레이어가 게임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결정한다.[3]
시스템 중심 분석: 루돌로지는 게임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고, 이 시스템 내에서 작동하는 규칙과 절차에 주목한다. 플레이어의 참여도, 게임 루프, 그리고 루딕 경험이 분석의 중심이 된다.[4]
형식주의적 접근: 루돌로지스트들은 게임의 형식적 특성과 특정 게임들의 형식적 품질에 대한 비교 연구에 집중한다. 이들은 게임 규칙에 초점을 맞추고, 표상적이거나 모방적 요소들은 부수적인 것으로 본다.[5]
내러톨로지는 서사와 서사 구조, 그리고 이것들이 인간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용어는 프랑스어 'narratologie'의 영어화로, 1969년 츠베탄 토도로프(Tzvetan Todorov)에 의해 만들어졌다. [6] 게임 분야에서 내러톨로지는 게임을 스토리텔링 매체로 보고, 캐릭터, 플롯, 설정, 주제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연구한다.
자넷 머리(Janet Murray)는 내러톨로지 관점에서 게임을 현대의 새로운 내러티브 매체로 보고, 스토리를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스토리텔링과 플롯 개발: 게임은 다른 매체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스토리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 이는 내러티브 구조, 플롯 개발, 그리고 플레이어가 게임을 깊이 있게 진행하면서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포함한다.[1]
캐릭터 개발: 게임의 캐릭터들에 초점을 맞춘다. 캐릭터들의 배경 스토리, 동기,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나 캐릭터들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된다.[1]
상징적 및 주제적 요소: 게임 내의 문화적 상징주의와 사회적 대화는 더 깊은 주제를 전달하는 내러톨로지적 측면이다. 게임은 영웅주의, 정체성, 도덕성 같은 주제를 활용하여 플레이어들의 스토리 해석을 형성할 수 있다.[1]
에스펜 아르세스(Espen Aarseth): 노르웨이의 학자로 비디오 게임 연구와 전자 문학 분야의 전문가다. 그의 1997년 저서 <사이버텍스트: 에르고딕 문학에 대한 관점들(Cybertext: Perspective on Ergodic Literature)>은 게임학 분야의 기초가 되었다.[7] 에르고딕 문학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독자가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의미를 생성하기 위해 '물리적 및 인지적 노력'을 추가로 요구하는 문학 형태를 의미한다.[8]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 우루과이 출신의 게임 디자이너이자 학술 연구자로, 루돌로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게임을 규칙에 기반한 시뮬레이션으로 보는 루돌로지스트 그룹에 속하며, 게임을 대중을 위한 최초의 시뮬레이션 미디어로 본다.[2]
자넷 머리(Janet Murray): 조지아 공과대학교 문학,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스쿨의 학자로, 내러톨로지와 루돌로지 논쟁의 기초적 논란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1997년 저서 <홀로덱의 햄릿: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내러티브의 미래(Hamlet on the Holodeck: The Future of Narrative in Cyberspace)>에서 비디오 게임을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현대의 새로운 매체이자 스토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보았다.[1]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 2002년 <내러티브 아키텍처로서의 게임 디자인(Game Design As Narrative Architecture)>이라는 글에서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 논쟁을 조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젠킨스는 게임의 공간적 특성을 강조하며 중간 지점을 제시했다.[9]
마리-로르 라이언(Marie-Laure Ryan): 게임 연구를 위한 내러톨로지 이론을 발전시킨 주요 학자다. 그녀는 게임이 스토리가 아닐 수 있지만 스토리를 생성하는 기계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10]
루돌로지스트들은 게임을 고유한 형식주의를 보여주는 별개의 경험으로 정의하며, 소설, 드라마, 시와는 다른 장르로 본다. 반면 내러톨로지스트들은 게임을 기존 내러티브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보며,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텔링 매체로 간주한다.[5]
루돌로지는 게임의 규칙과 시스템에 대한 형식적 분석에 집중하는 반면[5], 내러톨로지는 게임의 서사적 요소, 캐릭터 개발, 주제적 내용을 중시한다.[1] 이러한 방법론적 차이는 게임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
아르세스의 에르고딕 문학 개념은 이 논쟁의 핵심이다. 에르고딕 문학에서는 의미 생성 과정에서 독자의 능동적 선택, 탐색, 결정,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다. 소설 같은 전통적 텍스트처럼 앞에서 뒤로 읽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구조와 경로를 스스로 조작하거나 탐험해야한다. 루돌로지스트들은 이러한 상호작용성이 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별시키는 핵심 요소라고 본다.[8]
초기 루돌로지 대 내러톨로지 논쟁은 게임학 분야가 정의되는 과정에서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양쪽 모두 환원주의적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게임이 루딕 요소와 내러티브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이들이 협력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11]
현대 게임 개발은 루돌로지적 측면과 내러톨로지적 측면을 성공적으로 통합하여 플레이어들과 더 깊은 참여와 몰입을 만들어내고 있다. 게임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은 이제 게임플레이 메커니즘과 스토리텔링 요소가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들의 통합이 게임 경험의 몰입도와 풍부함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1]
두 관점의 충돌에서 나온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루도내러티브 디소넌스(Ludonarrative Dissonance)다. 이는 게임의 비상호작용적 요소를 통해 전달되는 내러티브와 게임플레이를 통해 전달되는 내러티브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2007년 게임 디자이너 클린트 호킹(Clint Hocking)에 의해 만들어졌다.[12]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가 제시한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 개념은 두 관점을 연결하는 중요한 이론이다. 이는 "규칙 기반 표현과 상호작용을 통한 설득의 기술"로 정의되며, 게임이 단순히 말이나 글, 이미지나 동영상이 아닌 과정 자체를 통해 설득력 있는 주장을 만들어낸다고 본다.[13]
테트리스(Tetris, 1984): 순수한 게임 메커니즘에 기반한 게임으로, 내러티브 요소가 거의 없으면서도 강력한 게임플레이 경험을 제공한다.
체스(Chess): 전통적인 보드게임으로서 루돌로지적 분석의 전형적인 예시다. 왕의 은유적 지위나 아케이드 플레이어의 영웅적 자아 인식은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된다.[5]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 2013): 강력한 캐릭터 개발과 감정적 서사로 플레이어들의 도덕성과 영웅주의에 대한 관념에 도전하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플롯보다는 캐릭터 개발에 초점을 맞춰 게임 역사상 가장 현실적이고 몰입감 있으며 감정적인 경험 중 하나를 창조했다.[1]
위쳐 3: 와일드 헌트(The Witcher 3: Wild Hunt, 2015): 복잡한 내러티브 분기와 도덕적 선택을 통해 플레이어의 결정이 스토리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1]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 간의 논쟁은 게임학 분야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이 두 관점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루돌로지적 접근법은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과 플레이어 참여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독립적으로 중요하며, 내러톨로지적 접근법은 게임이 목표로 하는 스토리에 초점을 맞춰 몰입감 있는 세계와 감정적 연결을 창조하는 데 필수적이다.[1]
현대의 게임 개발과 연구는 이 두 관점을 통합하여 더욱 풍부하고 의미 있는 게임 경험을 창조하고 있다. 게임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예술적, 문화적 매체로 인정받는 현재,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의 통합적 접근은 게임 스토리텔링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게임학의 이 두 갈래는 더 이상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게임이라는 독특하고 복합적인 매체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상호 보완적인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게임 스토리텔링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인용
[4] Sarah Lee, Ludology 101: A Beginners's Guide, Number Analytics, 2025. 06. 11
[11] Craig Carey, Ludology vs. Narratology, Slideshare, 2022. 0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