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상을 꿰매는 시간

화를 다스리는 바느질멍

by 이팝

오늘도 사춘기 아들에게 의문의 1패를 당했다.

끓어오르는 심장의 열기와, 버벅거리는 머릿속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원단을 펼쳐 본다.


머릿속으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말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지만, 왜 요녀석앞에서만은 입안에 왕사탕 하나 물고 있는 마냥, 말이 퍼뜩 퍼뜩 나오지 않고 버벅대는지.. 그 사이 요 녀석은 입에 참기름이라도 발랐을까, 말도 안 되는 이론으로 자기의 주장과 고집을 똘똘 뭉쳐 돌직구를 쉴 새 없이 날린다. 이성적으로도, 속도전으로도 참패 당해 이래저래 속상하고, 아픈 날이다.


이런 날은 뭐라도 만들며 머리와 가슴속 끓어오르는 울화를 식혀야 한다. 바로, 바느질멍이 필요한 순간이다.

옷을 만든다는 건 단순히 천과 실을 엮는 일이 아니라, 작은 조각조각의 시간을 꿰매어 나만의 내면을 치유하는 시간인 것도 같다.


'그래 상황은 웃프지만, 네가 아픈 것보다는, 내가 아픈 게 낫다!'


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펼쳐진 원단을 바라본다. 네이비 컬러에 잘게 찍힌 도트 무늬와,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짙어지는 아이보리 플라워 패턴이다. 이 원단도 언젠가 아들 녀석의 화를 받던 날! 동대문으로 달려가 사서 쟁겨뒀던 것이다. 무늬가 첫눈에 보고 반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잘 만들어진 원단을 볼 때면 마치 한 폭 그림 같은 느낌이다. 꽃잎인 듯 나뭇잎인듯한 흰색의 화사한 무늬들을 보고 있노라니 아들하고 언제 다퉜나 싶게 싹 잊고, 갑자기 기분이 급상승해서 사가지고 왔던 기억이 있다.


'병 주고 약 주고 다하네...'


이런 무늬들의 포인트는, 패턴의 배치를 상호대칭 잘 맞추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시간의 공든 탑을 쌓으면 될 터이다.


자와 초크로 패턴을 그리고, 재단 가위로 조심조심 자른다. 여름용으로 시원한 흰색 시폰을 안감으로 넣었다. 매끄럽고 시원한 느낌이 좋다. 가장 어려운 부분인 네크라인과 콘솔지퍼 부분이 실패하지 않도록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 박음질 선이 고르고 가지런하게 나오도록 조심조심 재봉틀의 장력을 조절해 본다. 항상 원단의 두께나 시접의 상황에 따라 재봉틀의 컨디션이 달라지기 때문에, 기계치인 나에겐 늘 어려운 일이다. 매 번, 할 때마다 헤매지만, 또 만들어 놓고 보면 뿌듯한 기쁨이 있다.


마침내, 나의 취향과 계획이 반영된 나만의 옷이 완성되었다. 나만의 호흡으로 완성한 옷은 그야말로 소확행 그 자체이다. 덤으로 옷을 만드는 동안, 수없이 나누는 스스로와의 우문현답은 결국 스스로를 위로하고, 아이와 나의 삶의 속도를 조율하고 중재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기도 한다. 당연히,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한층 단단하게 해주는 활력소가 된다.


이 번 옷은 그동안 만든 것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완성도가 높아 마음에 든다. 그래서 주로 전시회나 모임에 입고 가기에도 그만이다. 만든 건 줄 아무도 모른다. 이제는 알 수도 있으려나....




똑같은 옷인데, 찍은 장소의 조명에 따라 색이 다르다. 이래서 조명이 중요한 가보다...


다 만들고 났는데, 한 마정도 원단이 남았다. 그래서 고무줄 밴드 롱치마 만들었다. 좀 다른 느낌으로, 이번엔 안감을 검은색으로 넣어 보았다. 아이보리 무늬가 돋보인다. 흰색과는 다른 게 차분한 느낌이다. 배색이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진다. 이건 동생에게 선물로 택배 보냈다.



한 벌의 옷이 완성되는 동안, 울그락 붉으락 정점의 화는 사그라들고 없다. 사춘기 아들의 화를 받아, 갱년기 화로 풀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생각되고, 덕분에 수행하는 마음으로 옷 한 벌도 지었으니 감사한 생각도 든다.


그렇게 화를 잊고,

다시 또 함께 밥 먹고, 사소한 일로 또 투닥거리고, 바느질멍하며 철들어가는 중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