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시간의 기록 '소피아 미술관'

게르니카, 침묵의 울림

by 이팝

낯선 곳에서의 긴장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저녁이면 쏟아지는 피로에 고꾸라지듯 잠들었다가도, 새벽 4시 반이면 어김없이 눈이 번쩍 뜨였다. 황금빛 가로등 불빛이 번지는 창밖에는 고요한 비가 내리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밖의 날이 새기를 기다리다, 창을 조금 열어 마드리드의 새벽 공기를 가만히 들이마셔본다. 비와 나무의 냄새가 알싸하게 섞여 오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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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트에서 사 온 것들을 간단히 차려 남편과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갈 곳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맨 먼저 숙소 근처의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이하 소피아 미술관)를 들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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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미술관은 카를로스 3세 재위 기간에 신고전주의의 거장 사바티니가 설계한 '산 카를로스 종합병원'이란 유서 깊은 장소를 개조해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곳은 여느 미술관과는 결이 다르다. 화려한 미학보다는 전쟁과 프랑코 정권의 독재에 맞선 투쟁과 파업, 지식인들의 저항이라는 스페인 근현대사의 아픈 기록들을 잊지 않기 위해 보관 전시하는 것이 주요 목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 보슬비가 내리는 겨울 아침의 공기는 차분하면서도 묵직하다. 마치 우리나라의 어느 봄비 내리는 아침 같기도 했다.

'스페인에 있는 동안 비가 올까?' 하는 의구심에 챙겨 온 우산이 제 쓰임의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모습을 드러낸 미술관은 외관 공사 중이었다. 커다란 천에 가려져 전체 뷰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직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비 내리는 풍경을 응시하며 입장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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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입장이 시작되었다. 검색대를 지나 흰 벽과 아치형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개관 시간에 맞춰 온 덕분인지 미술관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2층 전시실로 들어서는 발소리들이 고요한 공기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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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 그림 앞에 섰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교과서나 책 속에서 보았던 자그마한 그림은 생각보다 스케일이 컸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운 거대한 캔버스는 단순히 회화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을 기록한 것 같다.

원색 하나 없이 무채색으로만 채워진 화면은 그 자체로 거대한 침묵의 절규 같았다.


image.png 사람들이 운집해 있어서 정중앙에서 찍기 힘든 피카소의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1936~1939, 민주주의의 공화파와 프랑코 군부세력의 민족주의파 사이의 비극적인 전쟁) 중이던 1937년, 나치 독일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당시 전투 능력이 없던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피카소는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고 전쟁의 참혹함과 파시즘에 대한 분노를 캔버스에 담았다. 이후, 이 작품은 특정 사건을 넘어 전쟁의 비인간성과 평화의 소중함을 상징하는 그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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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지식이 없어도 이 그림은 그 자체로 충분한 고통을 토해내고 있다. 무너지는 형상들, 뒤틀린 표정들, 끝내 닿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지는 외침들. 찢기고 울부짖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존엄을 부수는지 그 처참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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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이 사건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그는 적확한 언어를 찾지 못해 침묵의 이미지로 대신 외친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여인의 모습은 1937년의 비극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서 반복되고 있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서늘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소피아 미술관이 오직 비극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피카소의 방을 나와 복도를 걷다 보면 초현실주의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 다양한 화풍을 실험하던 살바도르 달리의 젊은 시절의 그림과도 만나게 된다.


image.png '기타를 든 화가(Portrait of a Painter with a Guitar)'-살바도르 달리(1923년작)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그레고리오 프리예토를 그린 것으로 피카소와 브라크가 주도했던 입체주의에 관심을 보이던 시기의 그림이다. 달리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이전에 학습하고 방황하던 시기의 그려진 것들이다.


image.png '창가의 소녀(Figura en una ventana)' -살바도르 달리(1925년작)


달리의 유명한 그림인 '창가의 소녀'는 그의 여동생이라고 전해지는데, 사실적인 정밀 묘사에서 또 다른 달리의 화풍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지 불과 몇 년 후, 달리는 흘러내리는 시계등 기괴하고 환상적인 초현실주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위 작품들은 달리가 가졌던 뛰어난 정교한 사실적 묘사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들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호안 미로의 천진난만한 선과 원색의 점들을 보며 무거워졌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그의 붓질은 어른이 되며 잃어버렸던 동심의 세계로 안내한다.


피카소의 친구이자 조각가인 훌리오 곤살레스와 협력하여 만든 걸작 '정원의 여인'이다.

전통적인 조각이 돌을 깎거나 찰흙을 붙여 만드는 '덩어리' 중심이었다면, 이 작품은 철판과 철사를 용접하여 공간을 투과시키는 철제의 선형 조각이다. 피카소가 아이디어를 냈고, 금속 세공에 능숙했던 훌리오 곤살레스가 기술적인 도움을 주어 완성되었다. 피카소의 또 다른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image.png '정원의 여인(Mujer en el jardín / Femme au jardin)'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훌리오 곤살레스(Julio González)


전시관람을 마치고 소피아 미술관의 현대식 확장동인 누벨 건물 쪽 계단을 올라갔다. 세계적인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이 설계했고, 2005년에 기존의 고전적인 미술관 건물을 확장하며 문을 열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천장의 붉은색 패널이다. 거대한 지붕 구조는 구건물과 신건물 사이의 마당에 빛을 반사하고 주변 경관을 투영한다.


사진 속 유리창 너머로 책장과 조명이 빛나는 공간은 미술관의 공공 도서관인데, 유리 외벽 덕분에 내부가 아름답게 보인다. 사람들이 서있는 아래쪽 삼각형 모양의 광장은 '플라자' 역할을 하며, 관람객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다른 전시동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된다. 옥상에서 비 오는 주변 뷰를 한참을 바라보다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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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은 풍경으로, 어떤 여행은 사람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번 마드리드 여행은 단 한 점의 그림, '게르니카'로 기억될 것 같다. 절규하는 시대의 아픔을 목격하게 하고, 그치지 않는 평화의 외침으로 나를 멈춰 세운 곳. 소피아 미술관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여전히 비 내리는 마드리드의 아침, 나는 다시 우산을 펼쳐 든다. 지구상의 모든 전쟁이 끝나고, 새벽에 보았던 그 황금빛 불빛처럼, 모두가 평범한 일상의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평화가 찾아오길 바란다.

예술이 건네는 위로가 우리 모두의 삶 곳곳을 비추었으면 좋겠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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