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괜찮아

세상은 기다려준다

by 이로

나는 스물아홉. 딱 스물아홉.

누가 봐도 젊은 나이인데, 가끔은 내가 80쯤 된 노인네 같다고 생각한다.

몸이 쑤시고, 기억력이 가물거린다. 물론 농담이다.

진짜 노인네 같다는 건 아니고, 그냥 세상이 너무 빠르다는 얘기다.

요즘 세상은 딱 봐도 ‘빨리빨리’가 기본값이잖아?


첫 번째 멈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다

오늘도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놓칠 뻔했다.

아침부터 망했다 싶어 체념하려던 찰나였다.

이미 안에 타고 있던 한 젊은이가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날 말없이 기다려주고 있었다.

문이 닫히다 말고 다시 스르륵 열리는 그 짧은 순간,

삭막한 철문 안쪽이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안식처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 작은 배려가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너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존중받는 존재야.' 별거 아닌데, 뭉클했다.

어라, 나 혹시 감수성이 너무 과해진 건가?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두 번째 멈춤: 은행 창구에서 들려온 또렷한 목소리

은행 창구에서 직원이 열심히 설명하는데, 자꾸만 헛들렸다.

젠장, 이러다 내 귀까지 80대가 되는 건가.

‘네? 뭐라고요? 다시 한 번만….’ 몇 번을 되묻다 보니 민망해서 내가 다 쪼그라들었다.

혹시 상대방이 짜증 낼까 봐 괜히 눈치도 보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젊은 직원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벌떡 일어서더니 내 쪽으로 허리를 숙여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설명해 주는 게 아닌가.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듯 선명했다.

이건 뭐, ASMR도 아니고.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었다.

한 사람의 자존감을 지켜주려는 그 마음 씀씀이에 아팠던 마음까지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역시 사람은 친절해야 해.


세 번째 멈춤: 쏟아진 물보다 시원했던 미소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 나는 유독 덤벙거리는 편이라 실수가 잦다.

얼마 전에는 식당에서 물컵을 쏟았다. 내 손이 말을 안 들었지 뭔가.

당황스러움과 민망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르바이트 학생이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괜찮으세요?" 물으며 묵묵히 바닥을 닦아줬다.

그리고 새 물컵을 가져다주면서 환하게 웃어 보이는데,

그 미소가 쏟아진 물보다 훨씬 시원하게 내 마음의 얼룩을 지워주었다.

'야, 실수 좀 하면 어때? 괜찮아!' 그 친절 덕분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는 세상임을 깨달았다.

그래, 까짓 거 좀 흘리면 어떠냐. 닦으면 그만이지.


평범함 속의 비범함

돌이켜보니 내 삶의 페이지들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친절로 채워지고 있었다.

슈퍼히어로는 아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빛을 내어 내 삶의 어둠을 몰아내 주는 사람들.

그들이 내민 손길 하나하나가 세상이 내게 말을 거는 따뜻한 순간들이었다.

오늘 하루 나를 스쳐간 ‘젊은이’와 ‘은행 직원’,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마음 깊이 감사 인사를 전한다.

당신들이 내게 행복한 하루를 선물했듯, 당신들의 하루 역시 세상의 모든 따뜻함으로 가득하기를.

이 감사의 마음이 돌고 돌아,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는 세상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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