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주

중년 백수 탈출기

by 일로

4. 구세주


그때였다. 갑자기 작은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처음엔 환청 인가 싶더니 귀 기울여 보니 분명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저 아래 수풀 넘어 누군가 있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너무나 멀게 느껴질 만큼 다리는 꼼짝하기

싫었다. 그래도 살고자 하는 마음에 소리나는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거기엔 조그만 텐트가 쳐져 있었고 거짓말처럼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분은 내 얘기를 듣고는 자신이 끓여 놓은 라면을 내밀었다. 라면을 얻어먹고 기운을 차리니 날은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자신이 산 반대편 절벽 아래로 사다리를 만들어 놨다며 내려가는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곳을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나는 두렵지 않았고 그쪽으로 주섬주섬 내려갔다.


그러다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이르러 그 아래를 살펴보니 길고 긴 사다리가 내려져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니 저 멀리 마을에 불 빛이 보였다. 아직도 녹지 않은 눈들로 갈증을 달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 뒤에 있는 마을은 생각보다 가까웠고 길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을에 이르러 이모집 마을 이야기를 하니 동네 할아버지께서 차비를 주며 거기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렇게 저녁 늦게 이모집에 도착하니 난리가 나있었다. 이모부는 아침나절 하천을 따라 올라가는 것을

동네분이 보았다는 말에 내가 죽으러 간 줄 알고 사람들을 모아 찾아 나설 준비를 하고 계셨다.

이모도 서울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부모님들도 큰 걱정을 하고 계셨나 보다.

이렇게 나의 합천 산봉우리에 관한 작은 추억은 마감을 하였다.


라디오를 켜놓고 나를 살려준 그분은 거기서 산불감시를 하면서 군대생활을 대신한다고 했다.

꼭 다시 찾아와 은혜를 갚겠다고 몇 번씩 다짐했지만 다시 못가 마음의 빚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 사건 이후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병무청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114에 전화를 걸어

병무청에 지원입대를 물으니 올해부터 법이 바뀌어 가능하다고 했다.


이 경험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지면 구세주가 나타난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확신은 군대 생활과 대학 입시를 통해 확인되었고 내 인생을 관통했다.

아내를 구하기 위해 주택관리사 시험에 도전했지만 이번에 깨달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나와 우리 아이들은 이미 구세주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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