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백수 일기
오늘은 아내와 서촌을 다녀왔다. 여러 번 갔었지만 오늘이 가장 즐거운 나들이가 되었다.
비가 올 듯 말 듯 시원해 손잡고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멋진 내 셔츠와 아내 목걸이까지 살 수 있었다. 백수 옷이 너무 많다며 싫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운동화도 이쁘다며 사주려는 걸 한사코 말려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가게에서 작은 진주목걸이를 맘에
들어해 내 카드로 허세를 부리며 미안함을 대신했다.
사실 어젯밤에 7월 말 여름휴가 계획을 잡아 달라고 했다. 나름 고민 끝에 강화도, 춘천, 남양주 코스를
보여주니, 다 싫다며 자신을 그렇게 모르냐는 것이다. 자신은 서촌이나 한남동 같은 아기자기한 소품샾들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휴가계획을 짜다 보면 나는 항상 목표 지향적이고 아내는 소소한 일정 자체를 즐기려는 경향이 있다. 아내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맘이 홀가분해져 괜한 휴가계획 고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일 코스로 어디든 멀리 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름휴가 여행 징크스가 하나 있다. 매번 가는 첫날 내가 배탈이 나서 그날 스케줄을 망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격지심에 아내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면 부부싸움 하기 딱 좋은 못난 감정들이 올라온다.
하지만 아내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현명한 대처를 한다.
오늘도 미리 휴가 여행을 시작하자며 서촌으로 브런치를 먹으러 가는데 거짓말처럼 속이 아파왔다.
주차를 하고 브런치집을 찾아가다가 통인시장 뒷골목에 이르렀을 때 상태가 갑자기 급박해졌다.
나는 통인시장에 들어가 화장실을 찾아보자고 했고, 아내는 가까운 카페로 들어가자고 했다.
먼저 카페로 가면 스케줄이 엉망된다며 내가 고집을 피웠는데,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 인근 카페로 들어가
주문을 해버렸다. 급히 화장실을 다녀오니 속이 편해졌는데, 바로 안 들어왔으면 늦을 뻔한 사실을 그때야
깨달았다. 아침 빈 속에 단백질쉐이크를 찬 우유에 마시고 나와 통제가 불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항상 여행을 갔다 오면 아내의 이런 행동들이 추억이 되어 자꾸만 아내와 여행을 가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