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어린아이

중년백수 일기

by 일로

참 이상하다. 어차피 백수 생활을 하고 있는데 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일까?

올봄까지 열심히 문화원도 다니며 그림을 그렸는데, 거실에 있던 이젤과 그림 도구들을 다 치워버렸다.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한가로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수 없었다. 오십 초반 자영업을 정리하고

아이들 입시를 함께하고 대학 생활의 자유를 덩달아 즐겼다. 아이들이 진로를 고민하는 시기가 되니,

나도 백수 생활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림에 몰입하다 보면 현실 도피한 낙오자가 된듯한 불안감에 휩싸여 서둘러 빠져나오곤 한다.

컴퓨터 앞에 앉아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다 해도 달라질 것 없는 똑같은 일상인데 말이다.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행여 나만 남겨두고 다들 떠나가는 것은 아닌지 보초를 서게 된다.

아직도 뭐가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더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만

같다. 지난 오 년간 백수로 맘 편히 놀지도, 그렇다고 그림을 열심히 그린 것도 아니다.


항상 쫓기듯 살며 제대로 뭔가 하나를 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마저 든다. 작년에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며 이제는 무용한 낭만과 그림을 즐기자고 다짐도 했었다. 오십 중반까지도 왠지 백수 눈치가 보여 빨리 오십 후반이 오면 좀 더 마음이 편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가 아무리 찾아와도 그런 상황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 지금처럼 내 안에서 눈치 보며 불안해하는 어린아이와 함께 끝까지 살아가야 하나보다.

흙먼지 나는 버스정류장에 홀로 남겨지고 모두 떠나버린, 그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거실 컴퓨터 책상 옆 탁자 안에 처박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보는 그림 도구들을 보면 미안해진다.

너무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어도 되는 건지 마음이 편치 않다.

5년 후, 아니 10년 후를 생각한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명확하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작년에 "앞집 부부의 행복이야기"를 내고

브런치 작가가 되어 글도 쓰고 있다고 내 안의 어린아이에게 위로와 칭찬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