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백수 일기
어제는 막내 생일이자 내 군 입대일이었다.
매년 이날이 오면 내 인생 방향을 결정한 그날이 떠올라, 딸아이 생일이 고맙고 반갑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6년.. 2월까지 재수학원을 다니다 3월 한 달 합천 이모댁에서 방황을 했다.
4월 1일 서울에 올라와 부모님 몰래 병무청에 가서 지원입대를 했다. 재수를 하는 척하다 8월 말
큰 형에게 실토를 했고, 그다음 날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예상보다 두 달 빠른 입대날짜를 보고 나는 시간을 아꼈다는 생각에 속으로 뛸 듯이 기뻤다.
그해부터 특기가 없어도 일반병으로 지원입대가 가능한 제도가 새로 생긴 것이 행운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막내아들의 비수를 눈감으려 애쓰셨고,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군에 가있던 작은형은 내가 꿈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탈영을 한다며, 막내 절대 군에 보내면 안 된다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누가 보아도 그렇게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
군 생활 30개월은 내 인생 방향을 제대로 틀어줬다. 비무장지대 도라 OP 내무반에서 우연히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란 사법시험합격수기집을 읽고 법대를 가자는 결심을 했다. 1989년 3월 제대 후
고시원에 처박혀 서울대 혈서를 써놓고 공부를 하다, 그해 여름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죽고 싶었던 나를 대신하셨다는 생각에 그해는 쉴 수 있었다. 다음 해 다시 입시를 시작했고 국민대에
들어갔다. 19살 지원입대가 내 인생에 단초가 되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을 했고, 그림이 내 인생 전부라 믿었기에 군에 안 갔다면 화가가 됐을 것이다.
지금의 아내와 아이들은 꿈도 꾸지 못 할, 미친 화가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멋진 예술가가 되었다
할지라도,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지금에 만족한다. 의정부 306 보충대 연병장에 앉아 자대배치를
받으며 나는 나 자신을 벼랑 끝으로 떠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해마다 9월 17일이 오면 아이 덕에 추억에 잠길 수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