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백수 일기
2주에 한 번씩 아내가 머리를 깎아준다. 6년쯤 전부터 머리를 깎아주기 시작했는데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처음엔 조금 어설펐는데 지금은 완전 베테랑 미용사가 되었다. 한 달 두 번씩 미용실 예약하고 가는 것도
번거롭고 비용도 무시할 수 없어 스트레스였다. 지금은 아내가 머리 깎아 주는 토요일이 기다려지곤 한다.
며칠 전에는 아내가 핸드폰 필름을 바꿔줬는데 지문도 묻지 않고 촉감도 좋다. 난 바꿀 필요 없다고 고집을
피웠던 게 민망할 정도이다. 내 옷이나 신발들도 항상 새롭고 멋진 것으로 바꿔주고 싶어 한다.
몇 년 전에는 어떤 중년이 입은 멋진 운동복 바지를 보았다면서 그 바지를 끝까지 찾아내서 사주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입다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신기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다른 남편들처럼 돈을 잘 번 것도
아니고, 지금은 아예 백수로 5년 넘게 아내에게 가정경제를 떠넘기고 있다 보니 더 그렇다.
신혼 때 아내에게 헌신했다던지, 뭔가 딱히 잘한 게 있었다면 좀 더 당당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내 말대로 독박육아에, 주식으로 돈 다 날리고, 도박하러 다녔던 최악의 남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외출할 때 옷 코디는 말할 것도 없다. 워낙 까탈스럽고 원망을 잘해 내버려 두는 게 아내 속이 편할 것이다.
어제 오전에도 교회 갈 준비를 하면서 여름에 안입던 반팔티를 발견해 그것에 맞춰 바지 코디를 해줬다.
예배당에 앉아 당신 때문에 반팔티 입고 와서 에어컨 바람이 춥다며 어린아이처럼 계속 투정을 했다.
내가 봐도 한심한 모습이었는데, 아내는 시간 있으니 추우면 햇볕에 나가서 걷고 오자고 했다.
아내와 손을 잡고 교회를 한 바퀴 돌고 들어오니 땀도 나고 괜찮아져 고맙기도 하면서 미안했다.
내가 뭔가를 불편해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조용히 해결책을 찾아 가져다 놓는다.
어느 날은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아내를 따라 25년째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내
모습조차도 실망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교회를 따라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것 같다.
머리 깎아주는 아내를 생각하면 좀 더 내 사랑과 믿음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