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백수 일기

부부싸움 백서를 내며

by 일로

중년 백수 일기


2020년 3월 아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나도 뭔가를 해야 했다.

이제는 아내와 돌아다닐 수 도 없었고, 아이들 학교와 학원을 "델따주" 해야 한다는 명분도 생겼다.

코로나까지 심각해져 집에 있는 내 모습도 자연스러워지자, 아예 백수를 공식화하기로 마음먹고

중년 백수 일기 블로그를 시작했다.


처음엔 블로그 만드는 방법도 몰라 대충 만들고 사진과 글을 올렸다. 어디서든 내 글을 쓸 수도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런데 아이들과 아내가 사생활을 노출시킨다며 너무 싫어해 당황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가족들 눈치를 보며 사진도 찍고 글도 올려야 했다.

시간이 흘러 두 아이 모두 대학을 가고 나니 우리 가족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기록으로 남겨졌다.


큰 딸 수능 전 연대 수시 1차 합격 소식에 온 가족이 기뻐하던 모습들과 서울대 합격자 발표 날의 감동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막내 수능 시험날 지옥에서 천국을 오가던 가족들 모습과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이대 추가합격 전화를 받고 울먹이던 풍경들이 그려져 있다.


우리 가족의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사진과 함께 기록된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보람은 없다.

언제부턴가 아내도 카페에 가면 나에게 포토타임을 줄 만큼 중년 백수 일기에 관대해졌다.

시작은 초라했어도 언젠가는 시간의 보상이 쏟아지게 됨을 경험했다.


내 인생에 일기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생각만 해도 오싹해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정신적 방황과 혼란 속에서 끊임없이 써내려 갔던 글들이 여기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아직도 다 찾지 못한 채 글을 써야 하는 신세지만 이제는 눈물이 날 만큼 감사한 일이 되었다.


특히 부부 싸움 한 날에는 어쩜 그리 일기가 잘 써지던지 창피하고 부끄러운 감정들이 고맙기까지 했다.

도저히 답이 없고 미칠 것 같이 끓어오르던 분노들도 글을 쓰다 보면 안개가 걷히듯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행복한 가정이란 인생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폭풍 후 속에서도 희미한 그 불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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