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의걸
방의걸(方義杰)은 수묵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확장해 온 작가로,
‘먹’이라는 단일한 재료 속에서 무한한 깊이와 층위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산과 숲, 물과 비 같은 자연의 순간을
마치 숨결처럼 포착해 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과 소리를 화면 위에 드러낸다.
작가는 어린 시절 양철지붕을 두드리던 빗소리에 매료되었고,
그 기억이 세월을 지나 지금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그는 “빗소리를 그림으로 옮긴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자연의 소리를 먹의 결로 생성해 내는 독특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짙은 먹과 옅은 색감을 겹겹이 쌓아 비가 내리는 숲길의 공기를 섬세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두터운 숲이 양옆에서 길을 감싸고, 화면 전체에는 빗줄기가 촘촘하게 떨어진다.
한 인물이 작은 우산을 들고 비를 맞아 걸어가는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는데,
그 인물은 비에 젖은 풍경 속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나타나는 듯 몽환적이다.
이 그림의 핵심은 ‘비’ 그 자체보다 비의 소리와 비가 만들어내는 기운이다.
눈으로 보는 빗줄기 이상으로,
공간을 채우는 습기·냄새·온도·바람 그 모든 감각이 먹빛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히 비 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 아니라, 비가 내리는 순간의 소리와 마음의 울림을 시각화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방의걸의 ‘생성의 결’ 전시를 찾았던 날이 떠오른다.
먹으로만 펼쳐낸 그의 세계는 숨이 막힐 만큼 경이로웠다.
안개가 낮게 깔린 몽환적인 능선,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의 기개, 그리고 어린 시절 빗소리를 기억하며 그렸다는 소나기 그림들까지.
그날은 운 좋게도 작가의 작품 설명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어릴 적, 양철지붕을 두드리던 두둑두둑한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에 빠지던 소년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어 그 소리를 그림으로 옮기고 있다고 했다.
‘빗소리를 그린다’는 말이 처음엔 비유처럼 들렸지만, 그림 앞에 서자 그 말의 의미가 단숨에 이해되었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 만드는 힘, 그것이 그의 작품에서 말하는 ‘생성’의 순간이었다.
소나기가 이렇게 시원하게 쏟아지고 나면
구름이 걷히고 밝은 하늘이 열리며
빗물을 머금은 잎들은 햇빛을 받아 진주처럼 반짝이곤 한다.
한 점의 그림은 자연이 품은 순환과 생명의 숨결까지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 비 내리는 풍경은 나에게도 또 다른 기억 하나를 데려왔다.
갑작스러운 소나기 쏟아지던 하굣길,
교문 앞에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수많은 어머니들.
쏟아지는 비 속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그 모습은
모성이라는 이름의 가장 조용하고 거룩한 장면이었다.
소나기는 그때마다 사랑의 단편들을 불러오는 신호 같았다.
방의걸에게 소나기는 어린 시절 양철지붕 위를 때리던 빗소리의 기억이라면,
내게 소나기는 어머니의 사랑을 불러오는 추억의 소리다.
그렇게 한 점의 그림은 서로 다른 기억과 감정을 생성해 내며 다른 빛깔의 소나기를 우리 마음속에 떨어뜨린다.
이 그림은 단순한 비 오는 풍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소나기를 마음속에 생성해 내는 그림이다.
한 사람에게는 잊힌 어린 시절의 소리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을 품은 기억의 빛으로
한 점의 먹빛이 두 사람의 추억을 조용히 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