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균
오치균은 한국의 색채 화가 중에서도 유독 ‘빛’을 잘 그려내는 작가다.
그의 그림은 현실을 그대로 옮겨 적는 묘사라기보다,
대상을 바라볼 때 마음 한구석에서 튀어 오르는 어떤 감정, 잔향처럼 남는 여운을 색채로 번역한 회화에 가깝다.
시간을 견디고, 계절을 품고, 삶의 질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존재!
오치균은 나무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들을 과감한 색, 두터운 물감, 사각거리는 질감으로 쌓아 올려 우리에게 ‘자연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천천히 되묻는다.
〈감나무〉는 가을의 끝에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한 그루의 침묵 같은 풍경이다.
배경을 채운 하늘은 짙푸른 청색에서 옅은 연하늘빛까지 계절의 온도를 넓게 펼쳐 놓은 듯한 그라데이션을 이룬다.
그 아래 서 있는 감나무는 잎을 모두 떨구고
가지만 남은 채 서 있다.
하지만 그 가지 끝마다 매달린 붉은 감들이
작은 등불처럼 화면을 지키며
가을이 마지막으로 남겨둔 선물처럼 빛난다.
오치균의 붓질은 거칠고 두텁다.
바람이 지나간 흔적, 햇빛의 잔열,
서리가 내린 새벽 공기까지 함께 굳어버린 듯한 표면.
그래서 이 그림 속 감나무는
그저 ‘보이는 나무’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견딘 한 존재처럼 다가온다.
이제는 감이 참 좋다.
예전엔 아삭한 단감이 전부였지만,
요즘은 며칠 기다려 손끝에서 스르르 무너지는 대봉의 깊은 단맛이 더 그립다.
그 변화가 단지 입맛 때문인지,
세월이 내 혀에 남긴 내공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감 하나에도 시간이 맛을 더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침마다 고향의 누나가 보내준 대봉을 만져본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과일들 사이에서
오늘 가장 잘 익은 하나를 골라 입 안에 넣으면
달콤함이 조용히 퍼져 나간다.
그 맛엔 늘 고향의 온기가 실려 있고
이 계절에만 허락된 은근한 기쁨이 숨어 있다.
빈 가지 끝에 매달린 분홍빛 감을 바라보면
가을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잎을 모두 떠나보낸 뒤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작은 알맹이 하나.
찬 서리를 버티는 그 모습 위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랫말이 겹쳐진다.
감이 붉어지듯 우리 인생도 어느새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깊어지고 있다.
며칠 전, 나태주 시인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그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편안함으로 말을 건넸고
그의 시는 낭독이 아니라 대화처럼 들렸다.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데도
그 말들 속에 담긴 삶의 무게와 따뜻함이
조용히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날 들었던 〈11월〉의 시 한 구절은
마치 일상의 언어처럼 담담했지만
그 담백함이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11월을 보내는 아쉬움을
어쩌면 이렇게 절제된 문장 속에 담아낼 수 있을까.
나는 그 단단함과 깊이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이제는 인생의 11월을 보내며
감처럼 발갛게 익어가는 그를 바라보며 12월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나도 그처럼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따뜻함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잘 익은 대봉 한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