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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윤석남

by 청일


1. 작가 소개


윤석남(尹石南)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삶의 중반을 훌쩍 넘긴 40대 후반,

그는 뒤늦게 미술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지만

그 시작은 결코 늦지 않았다.


그의 작업은 늘 존재의 진실을 마주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평생 보이지 않는 자리를 지켜온 여성들의 삶,

어머니라는 존재의 헌신,

시간이 한 인간에게 남겨놓는 흔적들을

정직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끌어올린다.


윤석남에게 그림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인간에게 시간을 허락하는 일’이며,

그 시간을 통해 한 존재의 존엄함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다.


2. 작품 설명


그녀의 자화상은 노년의 작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담대한 선언과도 같다.


작업실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은 모습,

머리카락 사이로 자연스럽게 드러난 흰빛,

세월이 새겨놓은 주름들이

숨김없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그 주름은 쇠락이 아니라

한 인간이 견디고 건너온 시간의 결이며,

작가가 예술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해 온 과정의 문장들이다.


배경을 가득 채운 초상들과 작업도구는

그가 살아온 날들,

그가 만난 존재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고독한 내면을 상징한다.

마치 한 생의 흔적이 한 방에 켜켜이 놓여 있는 듯하다.


이 자화상은 ‘나의 얼굴’이 아니라

‘나의 삶 전체’를 담고 있다.

그래서 더 정직하고, 더 아름답다.


3. 나의 감상


언제부터였을까.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서늘한 두려움이 되었던 때가.

사진 속의 나는 어느 순간부터

현재의 나와 멀찍이 떨어져,

시간의 낯선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억지로 찍은 단체 사진 속 얼굴을 확대해 바라볼 때면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움츠러든다.

세월이 남긴 흔적을 인정하지 못한 채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나의 완고함이

고스란히 들켜버린 기분이다.


하얗게 올라오는 머리칼을 숨기기 위해 염색약을 찾고,

거울 앞에서 주름개선 크림을 바르며

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것처럼

부질없는 주문을 외우곤 했다.

그러나 세월의 손길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틀림없이

우리의 얼굴에 자신만의 문장을 새긴다.


세종미술관을 나오던 어제,

카페 창가에 앉아 차를 기다리던 순간

유독 눈에 밟히던 백발의 노신사들이 있었다.

검은 코트, 오래 신은 듯 편안한 스니커즈,

그리고 햇빛을 머금듯 부드럽게 빗어 넘긴 하얀 머리.


잠깐의 스침이었지만

그들에게서는 나이를 관통해 나온

묵직한 기품이 느껴졌다.

숨어야 할 흔적으로만 여겼던 흰머리가

그들에게서는 오히려 한 사람의 내면을 비추는

투명한 광채처럼 보였다.


언젠가는 나도

그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게 될까.

세월이 만들어준 주름과 빛바랜 색조들이

부끄러움이 아닌

존재의 깊이가 되어주길 바라게 될까.


윤석남 화백의 자화상 앞에 서면

그의 시간과 내가 지나온 시간이

어딘가에서 은근히 겹쳐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 얼굴에는 삶의 상처와 온기가 함께 붙어 있고,

그 손에는 걸어온 날들이

빗살무늬처럼 정겹게 새겨져 있다.


세상과 부딪히며 깎여나간 부분들,

버티고 견뎌 남긴 흔적들,

그리고 마침내 영혼의 온도까지 드러내는 그림 앞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얼굴을 바라볼 때

나는 인간이란 결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 임을 절감한다.


나는 이제야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닦고, 돌아보고,

또 한 번 낮추며 다시 일어서는

긴 시간의 고요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 길을 비로소 걷기 시작하려 한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의 눈에 한 폭의 자화상처럼

시간의 빛을 품은 존재로 남을 수 있도록.


주름진 얼굴에 피어나는

세월의 훈장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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