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
시작은 늘 하나의 선에서부터
1. 작가 소개
이배는 ‘그린다’는 행위의 본질을 집요하게 탐구해 온 작가다.
그는 대상을 묘사하기보다, 행위 그 자체—붓을 들고 선을 긋는 몸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반복되는 붓질, 먹의 농담, 화면 위에 남은 흔적은 어떤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 시간과 호흡, 그리고 인간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배의 작업은 동양 서예의 정신과 현대 추상회화의 감각이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선을 긋지 않는다. 선을 긋는 순간에 이미 의미는 발생한다고 믿는다. 그의 화면에는 시작과 끝, 완성과 미완의 경계가 없다. 오직 반복과 지속, 그리고 살아 있는 몸의 흔적만이 남는다.
2. 작품 설명
이 작품은 구체적인 형상이나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다. 화면을 가득 메운 것은 방향을 달리하는 수많은 검은 붓질이다. 일정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속도와 압력, 리듬을 지닌 선들이 겹겹이 쌓이며 하나의 장면을 이룬다.
이 붓질들은 무엇을 말하기보다, ‘행해졌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한다. 잘 그리려는 의지도, 완성에 대한 집착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붓이 종이에 닿고, 다시 떨어지는 순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것은 결과의 기록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이며, 작가의 몸이 지나간 자리다.
이 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선을 긋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배의 붓질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선처럼 삶 또한 그렇게 지속되고 있음을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3. 나의 감상
중학교 1학년, 한자 시간이었다.
칠판 위에 선생님이 분필로 길게 선 하나를 그었다.
“이것이 너희가 배울 첫 번째 글자, ‘한 일(一)’ 자다.”
모든 글은 그렇게 하나의 선에서 시작됐다. 그 단순한 획 하나가 모여 글자가 되고, 뜻이 되고, 결국 한 사람의 문장을 이룬다. 내 삶의 모든 시작 역시 언제나 하나의 선에서부터였다.
머릿속에만 머무는 계획은 공상에 불과하다. 연초에 세웠던 거창한 다짐들이 그저 글자로만 남았다면, 지금의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시작했다는 사실은 결과보다 앞선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선을 긋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종이는 여전히 비어 있고, 삶은 고여 있을 뿐이다.
나이가 들며 몸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예전에는 정신력이 모든 것을 이긴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마음을 담는 그릇인 몸이 무너지면 그 위에 정성껏 쌓아 올린 꿈도, 사랑도 함께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안다.
운동화를 신는 손길에 힘을 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옷이 땀으로 젖어드는 이 시간은, 나 자신을 가장 정직하게 사랑하는 방식이다.
오늘 흘린 땀방울은
내 몸이라는 도화지에 긋는
가장 솔직한 한 획이다.
책을 쓰겠다는 목표도 이와 닮아 있다. 텅 빈 메모장 앞에서 나는 다시 ‘한 일(一)’ 자를 긋는 마음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이 지루한 반복이 결국 나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것임을 믿는다.
인생은 완벽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아니라, 무수한 선을 긋는 과정이다. 때로는 선이 삐뚤어지기도 하고, 긋다가 멈춰 서기도 한다. 하지만 멈췄던 자리에서 다시 선을 잇는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이어지는 과정이 된다.
하지 않은 것보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언제나 낫다. 이 무수한 시도들은 단순한 경험의 축적을 넘어, 내 삶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근육이 된다.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흐른다. 직접 발을 내디뎌 본 사람만이 그 흙의 감촉과 바람의 냄새를 기억한다. 경험의 차이가 곧 삶의 깊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주 작은 실천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거창한 완성이 아니라, 단 하나의 올바른 획을 긋기 위해. 멈추지 않고, 조금씩, 나만의 선을 이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