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
1. 작가 소개
윤형근 (Yun Hyong-keun, 1928–2007)은 한국 단색화의 핵심 작가로, 동양적 사유와 서구 추상의 언어를 가장 깊이 있게 결합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업은 화려한 색이나 형상을 거부하고, 오직 색의 깊이·중력·침묵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탐구한다.
특히 울트라마린 블루와 엄버(Umber)를 겹쳐 쌓아 만든 화면은, 하늘과 땅·빛과 어둠·열림과 닫힘 사이의 경계를 사유하게 한다.
윤형근의 그림은 ‘그린다’기보다 참고, 견디고, 스며들게 하는 시간의 기록에 가깝다.
2. 작품 설명 Umber-Blue
이 작품은 캔버스 양쪽에 세워진 짙은 색의 수직 기둥과, 그 사이에 남겨진 밝은 여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엄버와 블루가 겹쳐진 색면은 벽처럼 서 있으면서도, 완전히 닫히지 않은 틈을 남긴다.
이 틈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빛이 통과하는 길, 숨이 드나드는 통로, 침묵 속에서 열리는 관계의 여백이다.
윤형근에게 색은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이며,
수직의 형태는 인간이 서 있는 자세, 혹은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처럼 읽힌다.
막혀 있는 듯 보이지만, 화면 전체는 오히려 “통하고 있음”을 말한다.
3. 나의 감상
관계의 여백: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
골짜기 사이로는 물길이 흐르고,
산과 산을 넘어서는 구름이 흐른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情)이 흐른다.
윤형근의 화폭을 닮은 세상의 모든 ‘사이’에는
저마다의 통로가 있다.
벽과 벽 사이에 남겨진 그 좁고도 넓은 길을 통해
물은 길을 내고,
바람은 소리 없이 지나가며,
마음은 비로소 상대의 깊숙한 곳으로 스며든다.
그 통로의 폭은
우리가 지닌 마음의 깊이에 따라
때로는 협곡처럼 좁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대지처럼 넓어지기도 한다.
어떤 관계라도 바람이 지날 빈틈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계는 숨을 쉰다.
틈 없이 꽉 막혀버린 물길에는
생명이 스며들지 못하고,
바람이 머물지 못하는 자리에는
온기가 남지 않는다.
마음 또한 끝내 닿을 곳을 찾지 못한 채
길을 잃는다.
결국 관계란
서로를 향한 세심한 배려이자
스스로에게 허락한 마음의 여유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의 존재를 침범하지 않는
‘여백’은 필요하다.
물길이 흐를 틈,
바람이 지날 여백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흐를 수 있다.
삶이라는 복잡한 수식 속에서
우리는 어떤 함수로도 풀 수 없는
‘적당한 거리’라는 난제 앞에 선다.
보이지 않는 눈금으로 그 간격을 재고,
짐작하고,
다시 가늠해 보며
우리는 관계라는 삶의 기술을 배운다.
작은 골짜기의 물줄기가
큰 강으로 나아가기 위해
둑과 둑 사이의 간격을 넓혀야 하듯,
우리 또한 더 큰 마음을 품기 위해
내 안의 기둥들을
기꺼이 멀찍이 세워두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내 마음의 물줄기를
더 깊고 넓게 만들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넓고 깊은 강이 흐를 때,
타인은 더 이상 파도나 소용돌이가 아니라
그저 고요히 품어줄 수 있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바다와 같은 마음에 이르기 위한
지난한 노력들이
차곡차곡 퇴적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떠오르는 태양 아래
흘러가는 하루를 겹쳐 쌓으며
나는 다시
내 마음의 폭을 가늠해 본다.
오늘, 나의 여백은
누군가에게
기꺼이 숨통이 되어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