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생각하지 못한 독박육아를 하게 된 자의 프롤로그
나의 이름보다는
딸아이의 이름의 수식어가 앞에 붙은
OO아빠가 자연스러운 현재의 나다.
지금보다 조금 젊었던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청년이었고,
생각한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열정적인 실행가로 기억한다.
대학 졸업 후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보다는
모험가로서의 삶을 동경하여 오토바이와 함께
세계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평생의 로망이었던 것을 이루고 나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잠시만
길을 틀어 가보자라고 생각하며 실행을 했다.
첫 번째,
그들이 원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찾자.
나름 열심히 준비해서 그리 늦지 않은
30세에 소위 말하는 대기업에 취업에 성공하였다.
지금까지 13년간 한 회사에서 부장이라는 직급을
받을 때까지 비교적 잘 붙들려 있다.
두 번째,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자.
그 당시 8년째 사귀어온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동갑으로 나보다 먼저 사회에
발을 내딘 상태였다.
여자라면 한 번쯤 꿈꿔 왔을 선망의 직업을 가진
그녀와 나는 양가 부모의 큰 도움 없이
작은 집에서 행복을 꿈꾸었다.
그리고,
13년 9월 결혼 후..
14년 10월 우리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계획되지 않았던 아이였지만 너무 행복했다.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우리가 받았던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해주자라는
다짐을 하였다.
아내는 임신과 동시에 휴직을 하였고
아이가 첫돌을 맞이할 때즈음
복직을 고민하게 되었다.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은 알고 있지만 현실과 부딪혔다.
오랜 고민 끝에 복직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고,
직업특성상 해외에 자주 나가야 하기 때문에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나의 큰누나도 출산을 했기 때문에
처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리는 신혼집을 1년만 살고 조금 무리해서
처가의 근처에 집을 얻었다.
근데 이것은 실수였다.
당연하게 생각한 조부모의 도움을 받기 어려워졌다.
사실 복직의 결정보다도 출산 후에 장모님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고 당시에도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좀 더 가까우면
서로가 좋을 거라 생각했었다.
근데 아니었다.
어느 날,
“아이는 스스로 키워야지,
너무 기대면 안 된다”
라는 뉘앙스로 현관문을 나가는
장모님의 말씀이 있었다.
(너무 충격적이라 정확한 워딩이 기억이 안 남)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
도와주시면 감사한 거지…
꼭 받아야 할 권리는 아니지..
첫 손주고
굳이 이사까지 왔는데?
딸은 복직을 해야 하고
출퇴근도 아이고 며칠을 출장처럼 가야 하는데..
나는?
내가 뭘 할 줄 알아?
내가 능력이 있으면 아내가 일을 그만두고
애만 보면 되는데.. 내 잘못이네..
아. 사람을 쓰자..
아.. 우리 소중한 아이한테 우리처럼 잘해줄까??
아… 결국 내가 잘못했네..
이렇게 나의 독박 육아는 시작되었고,
불행 중 다행인 건 회사 근처의 국공립 어린이집에
회사 티오로 입소를 할 수 있게 되어
돌 막 지난 3세 아이와의 출퇴근이 시작되었다.
5년간 회사를 함께 다닌 사랑스러운 우리 딸은
코로나 시기 초등학교 입학을 하였고,
한국나이 10살 초등학교 3학년,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와 단 둘이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다.
벌써 10개월째..(육아휴직 중)
(아내와도 아주 잘 지내고 있음)
딸은 아빠와 무엇인가를 같이하는 게
당연하게 되었고, 엄마라는 호칭보다
아빠라는 호칭이 먼저 나오게 되었다.
서두에 말했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잠시만 다녀오자라고 했던 생각과 실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나는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잖아? “
“나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잖아!!”
라는 생각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게 내가 원하는 방향이었나?’
‘내가 생각한 게 이거였나?’라는 혼동에 빠진다.
지금 나는,,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아빠 혼자 애 키우는 이야기
아빠 육아휴직 이야기
아빠와 딸의 공감대 형성하는 방법 이야기
자녀 영어 공부 이야기
자녀 조기유학 이야기
뉴질랜드에서 1년, 2년 살기 이야기
그리고,
나의 생각대로 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