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디 Jan 24. 2024

처음 그림 그대로

디자이너지만 문과라 그림 처음 배워요

어쩌다

그림이여.


“홍디님, 그림 배워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처음 배워요.”

“중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붓 사용해 보셨죠? “

“아, 네, 뭐.”


수채화 수업 첫날. 선생님께서 하신 의례적인 질문에 알쏭달쏭한 사실을 답했다. 열댓 명이 있는 낯선 강의실에서, 처음 만난 선생님께 속내를 털어놓기에는 거시기했으니.

‘그림은 배워본 적 없지만, 패션디자이너로 꽤 오래 일하다가 지난주에 그만뒀어요.’

이리 말한 들 뭣이 다른가. 화실이라고는 동양화과 다니던 부유한 친구 따라 들어가 본 게 전부인 문과출신이고, 갓 퇴사한 새내기 백수인 것을.


수채화 처음 배우던 날 선긋기와 칠하기 @HONG.D / 빈티지한 팔레트 @스승님 협찬


첫 시간은 털털이 빈 손으로 수업에 참여하면 되었다. 선생님께서 빌려주신 팔레트를 보라. 세월의 흔적이 퍽이나 아름답다. 처음 색으로 익숙한 보라를 골라보았다. 처음은 아닌데 처음 해보는 듯한 붓질. 붓에 물감을 얼마나 묻혀야 하는지, 붓은 연필 잡듯 하면 되는지 도통 모르겠다. 가로, 세로, 사선의 선긋기와 면을 칠해보는데, 쓸데없이 몸에 힘만 잔뜩 들어간다.


전직 디자이너면 뭐 하냐. 수채화 세계에서 걸음마 첫 발을 떼어보는 문과 출신 의상학도는 조금 전 선생님께 디자이너라고 말하지 않은 게 만만다행이었다.




22년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쉼 없이 내달렸다. 두 아이 키우는 동안 휴직이라고는 애 낳을 때 90일씩 출산휴가를 쓴 게 전부다. 아이들 백일잔치도 하기 전에 복귀했던 대체불가한 디자이너 업무. 고단하던 세월을 마감하고 곧바로 시작한 취미가 붓질이다.


[취미] 사전적 의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다. 덕업일치를 살았던 디자이너는 취미를 갖는 게 처음이었다. 어쩌다 취미 삼아 그리게 된 그림이 어떤 의미인가 이제와 생각해 본다.


그리기 전의 나는
돈을 버는 데에만 시간을 썼다.

그린 후의 나는
시간을 들여 배움을 즐기게 되었다.



수채화 첫수업 끝나고 집에 가는 길 @HONG.D


가보자

그림이여.


수채화를 처음 배우고 집에 가던 길, 덜 마른 물감이 번질까 고이 손에 들고 걸었다. 그 걸음과 함께했던 공기와 햇빛을 기억한다. 따스하게 살랑이는 바람마저 촉촉한 마음과 그림을 말려주었다. 별달리 초의(처음 품은 뜻)는 없었으나, 초심은 잊지 못하리. 업무와 육아로 쳇바퀴 돌던 생활이 이 날 이후로 서서히 바뀌어 왔는지 모른다.


그림이 아니고 무엇이었든 돈과 상관없이 시간을 들이는 경험은 깨달음을 주었다. 배운 적도 없는 글을 쓴다고 자판에 손을 올려둔 지금이 소중한 것도 결이 같다. 속이 터질 듯 느려터진 속도지만 연재글과 그림을 준비하는 시간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목적지가 어디든 가는 길을 둘러보고 즐기련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행복하다.


해보고 싶다면, 지금 행하자.
하고 나서의 뉘우침은 행복한 꿈을 꾼다.
 하지 못한 후회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응답하라

그림이여.


해보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맞나요?
똥손도 될까요? ㄷㄷ손이지만 그림 도전해보고 싶어요.
붓을 잡을 용기가 없어요.
작가님 믿고 해 봐도 되나요?
따라 해볼 욕심으로 열심히 읽었어요.
같은 재료, 다른 느낌의 폭망이 예상되어 용기가 안 나요.
친절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니, 절로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지난번 [수물수매] 연재글에 독자분들께서 수채화에 대한 질문 댓글들을 남겨주셨다. 소중한 관심들 모아 살펴봐드려야지. 나만 믿고 따라오시라 하기엔 나의 그릇이 아직 덜 여물어, 오롯이 담아내기가 아쉽다. 유명한 큰 그릇의 말씀으로 응답한다. 오바.



만약 마음속에서
’나는 그림에 재능이 없는걸‘
이라는 음성이 들려오면
반드시 그림을 그려 보아야 한다.
그 소리는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잠잠해진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찰칵 @HONG.D



+덧마디.

땅 위에 올려둔 잎사귀 그림은 수채화 배운 지 한 달 되던 날의 기록입니다. 우리 모두 한 달이면 그려낼 수 있어요. 스킬은 어눌해도 다시 그리라면 이 느낌 못 냅니다. 곱씹어 말하지만 예술은 취향입니다. 살아가는 우리들이 행위 예술가 아닌가요호홍홍홍.




[수물수매] 수요일마다 물드는 수채화의 매력



이전 03화 하늘을 선물하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