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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디 Jan 10. 2024

눈으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하늘앓이의 시간여행

그날의 하늘을 기억하나요?


‘하늘’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으신가. 여행지에서의 멋들어지게 노을 지는 하늘, 이른 새벽 눈 비비고 일어나 호텔 창밖으로 바라본 동트는 하늘. 먼저 추억하는 장면은 어쩌면 일상의 나와바리(‘구역’으로 순화하고 싶지만 느낌이 안 살아 양해바람)를 벗어나 있을 수 있다. 바쁘다 바빠 K일상에서 하늘 볼 여유가 어디 쉽게 있나 뭐.  


생활의 구역 내에서 길 가다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긴 있을 거다. 아이가 기저귀 궁둥이를 씰룩거리던 귀염둥이 시절을 떠올려 보자. 손을 잡고 동네 산책을 하다가 하늘에 비행기 한 대 지나가면, “비행기다” 아이와 함께 손짓하며 바라보았지.


몇 년 만에 슈퍼 블루문이 뜬다고 너도나도 밤마실을 나와서 달사진을 찍다가 ‘에잇, 폰 바꿔야지’ 한 적도 있다. 언론에서 일식이니, 월식이니 오늘 못 보면 몇 년 후에나 볼 수 있는 하늘을 요란 떨 때마다, 아이들과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돌아왔지. 그게 하늘을 본 건지 돈을 쓴 건지.


라떼는 말이야. 이런 유행도 있었다.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손흥민이 찰칵 세레머니하듯 손가락 앵글에 헬리콥터를 잡아넣었다. 그날의 액운을 떨치고 행운을 빌었다고나 할까.


삼천포로 빠진 거 아니다. 하려는 이야기 쭉 이어진다고요호홍홍.




하늘앓이의 시간여행


하늘은 아등바등하는 일상에서 잠시 꿀 같은 선물이었다. 언제부터 하늘앓이를 했던가. 언제든 올려볼 수 있기에 당연한 듯 살고 있어 떠올려 본 적이 딱히 없었다. 잠시 짬을 내면 공짜로 충전되는 하늘에너지. 하늘이 머금은 꿀단지의 달콤함을 현재부터 거슬러 회상해 볼까.


어제저녁에는 샤브샤브 야채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얘들아, 엄마는 20분 정도면 저녁 준비가 끝난다.”

거실에서 놀고 있는 남매에게 눈길을 주며 복식발성으로 외쳤다.(잠보다 먹는 게 중한 애미가 요상한 녀석들을 낳았다. 잠이나 밥은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놀이형 아이들) 그러다 시선을 사로잡혀 청경채를 냅다 팽개치고 창문으로 달려갔지. 목표한 바가 있으니 바닥에 널브러진 레고 조각들을 밟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참에 발바닥 지압하는 거지 뭐.

“어머어머, 오늘 칼라 끝내준다. "

"어디어디, 엄마 사진 찍어찍어! "

그렇게 아이들도 놀던 레고를 던져놓고 어느새 창문에 달라붙어있다. 푸르르다 붉어지는 노을빛 하늘. 똑같은 빛이 다시는 없을 유일한 순간을 셋이 함께 눈에 담았다. 애미 닮아 하늘바라기인 내 새끼들이다.


다이소1000원 마스킹테이프로 뚝딱 @건순이의 그라데이션 하늘


건순이와 유치원 버스를 타러 나간 아침에는 매서운 바람에 손끝이 시려도 폰을 꺼내 나무와 하늘을 사진으로 남겼다. 눈이 녹아가며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가지와 솜사탕을 찢은 듯한 구름이 어우러져 있었더랬다. 건만이 축구 라이딩을 오가며 여름에는 저녁노을을, 겨울에는 달빛 밤하늘을 찰칵거렸다. 여행지에 가도 잔뜩 찍어오는 하늘 사진에는 그날의 향기가 치명적으로 담겨있다. 누가 보면 셔터 잘못 눌렸나 할 만한 거기서 거기인 하늘, 하늘 또 하늘.


과거로 더 거슬러 올라가 본다. 건만이 낳고 산부인과에서 조리원으로 가는 길에 올려다본 구름 선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구름 사이로 빼꼼한 해 덕분에 하늘색이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산모레깅스 속 어그적거리는 엉덩이를 가리기 위해 무릎까지 길게 걸쳐 입은 청남방 칼라와 친구 먹었었지.

십 수년 전 결혼식이 끝나고 공항을 가기 위해 차를 타려다 잠시 멈춘 순간도 있다. 웨딩카 문틀을 살포시 잡은 손, 당시에는 가녀렸던 신부의 팔과 높디높은 하늘이 오버랩된 장면은 시들지 않고 달콤 앨범에 고이 들어있다. 실물은 없지만.


단 한 장밖에 없는,
눈으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HONG.D 그리고 찰칵




유한락스의 졸작


달콤한 에너지의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꺼내보면서, 하늘앓이의 시간여행은 이쯤 마무리하나 싶었다. 어헛. 그러다 문득 섬뜩. 돈망하고 있던 하늘의 기억을 떠올리고 살갗이 오그라들었다.


자그마치 23년 전인 2001년, 의상학과 졸업전시회 작품을 준비하던 야리야리한 자신을 깨달았다. 화려한 실크 드레스도, 고품격 전통복식도 아닌 ‘데님’을 소재로 한 스물셋 홍디의 졸업작품 타이틀이 ‘하늘’ 이었었네. 셀프 깜놀했다.


구름과 하늘빛 그라데이션으로 수십 미터의 데님원단을 탈색하느라 유한락스에 어질어질하던 시절이었다. 1975년생 유한락스 선배님을 졸작에 들이부으러 얼마나 사다 날랐나. 학교 주변의 보건위생을 책임질 기세로 쓸어 온 2L짜리 락스통을 이고 지고 다녔지. ‘데님’을 좋아하고 ‘하늘’을 동경하며 ‘옷’을 디자인하고 싶었던 아가씨 마음은 소름 끼치게 지금도 변함이 없구나. 달라진 것은 껍데기일 뿐. 싱싱한 아가씨 아니고 늘어진 아줌마.


알맹이는 한결같은 아줌마야. 몸뚱이는 무거워도 뜨거운 열정으로 날개 펄럭이며 날아올라보자. 펠트솜으로 찬물, 끓인 물 오가며 만들어냈던 날개 구름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듯이. 이제 막 24년에 발을 디디고 문지방을 밟은 채, 모두 잠든 고요 속에서 증거물을 찾아내었다. 색 바랜 사진 한 장이 가슴속 열기를 끓어 올린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은 건순이 해열시럽과 하이파이브할 만한 색상. 딸아이가 열이 내린 사이 애미가 뜨겁게 솟구친다.


2001 치명적인 락스향의 졸작. 2024 문턱에서 찰칵 @HONG.D


바람에 구름이 떠밀려가듯 하늘과 함께 시간을 거슬러가다 멈추었다. 시간 여행은 멈추었는데 종착역이 여기가 아닌가 보다. 앞으로 나아갈 시간에 멋모르게 기대가 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다. 흘러가는 것을 섬세하게 살피고 담아두고 싶다. 진심 어린 소소한 창작물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엔도르핀이 되길 바란다.

일상을 디자인하며 인생을 기대해 본다.




+덧마디.

[수물수매] 지난 주 연재 첫 번째 글에 심경 고백을 했는데, 고백할 것이 또 생겼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라이킷과 댓글들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을 겁니다. 조회수 터지는 기쁨은 잠시의 쾌락이고 지나 보면 별 일이 아니었거든요. 쓰른이들의 인기가 별로 안 부럽습니다. 글을 쓰며 스스로 단단해지니까 말입니다. 

독자분들의 호응과 응원의 말씀들 잊지 않고 힘들 때마다 볼 작정입니다. 일주일 사이에도 들락날락하며 보고 또 보고 충전했습니다.

하늘 에너지가 고속충전이라면, 댓글 에너지는 힘세고 오래가는 에너자이저요호홍홍.



[수물수매] 수요일마다 물드는 수채화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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