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바라기의 고백
글을 쓰지 못하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려는 ‘쓰린이=어린 쓰는자'는 일상이 무탈해야 글도 술술 풀리는가 보다. 위로 아래로 쓰리고 버거운 일상을 쳐내면서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날들이 쌓여갔다. 쓸 새 없는 시간이 그리도 길게 느껴졌는데, 헤아려보니 고작 보름 남짓이다.
읽는자에게 읽지 않거나 멋대로 읽을 자유가 있듯,
쓰는자에게 쓰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쓰지 않는 시간도 유의미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크리스마스 트리에 빙 두른 지네전구를 풀어내듯, 얽힌 머릿속을 밝혀 풀이해 본다.
쓸 새 없는 시간의 쓸모에 대하여.
하나.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의 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두울. 쓰는 대신 읽고 만나고 대화하며 생각을 이어갔다.
세엣. WHY, HOW 따위 뭣이 중헌디. 그냥 쓰고 싶었다.
네엣. 그릴 수는 있어서 붓을 들고 손을 놀렸다.
다섯. 끼적이고 그려낸 조무래기들을 인스타에 소개했다.
여섯. 한적한 여행지로 훌쩍 떠나 하늘을 실컷 품고 왔다.
일곱. 방전된 마음배터리가 하늘에너지로 충전되어 간다.
여덟. 글감은 쌓여가고 생생함은 흐릿해져 가니 이걸 어쩌나.
아홉. 심호흡 크게 하고 한 줄만, 두 줄만, 열 줄까지만 풀어보자.
여얼. 실제로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를 풀어내고 안녕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적다 보니, 못 쓰면서 애태운 시간도 값어치가 있긴 하네. 거실 한편 크리스마스트리 자리는 속 시원하지만, 나의 마음트리에는 떼어내야 할 오너먼트들이 아직 남아있다. 겨울이 가기 전에 나무도, 장식도 망가지지 않게 차근차근 정리해 보리라. 혹여 이 겨울이 지나면 뭐 어떠리. 다음 겨울에 귀찮지 않고 편하지 뭐. 먼지나 툴툴 털어서 멋들어지게 꾸미면 될 일이다.
브런치작가가 된 지 두 달여. 앞만 보고 네 발로 기어서 돌진하다가 잠시 몸을 움츠린 채 고개를 들어보았다. 어서 걸음마를 떼고 직립보행을 하고 싶다만, 세상만사 서두른다고 쉬이 되겠나. 고작 문지방을 넘어 네 발에서 두 발로 일어서는 ‘쓰린이’가 먼저 글삶을 살아가는 ‘쓰른님=어른 쓰는자’들을 올려다보았다. ‘쓰른님’들의 움직임은 눈이 부셨다. 글세상에서 화려하게 걷고 뛰고 날아오르는 듯했다. 발을 떼지 못하고 초조하게 뒤쳐지는 건 나 뿐인가.
방전된 마음배터리를 충전하러 떠난 여행지에서도 손에 들린 폰 속에는 부러운 움직임들이 가득했다. 하늘 에너지를 받기 위해 잠시 알림을 꺼두었다. 폰 배터리가 다 닳도록 찰칵거리며 올려본 하늘은 나를 말없이 품어주었다.
‘너의 속도로 흐르는 대로 나아가렴’
마음으로 들렸다. 그래. 가랑이 안 찢기게 부여잡고 나대로 해나가야지. 네 발로 기어 다니던 건순이가 한강 바람을 즐기며 인라인을 타고, 한 발 떼기가 그리 조심스럽던 건만이가 축구장에서 날쌔게 드리블을 하지 않는가. 물론 집구석에서는 아드님의 직립보행이 최대의 난제이다만.
아등바등하는 일상에서 하늘은 늘 나에게 꿀 같은 ‘쉼’이 되어주었다. 바라보는 동안은 고단함이 스르르 사라지고 오롯이 나를 충전할 수 있다. 퇴근길 운전을 하며 흘깃한 노을빛에도 순식간에 가슴이 뜨끈하며 고속충전되었었지. 나라는 ’쓰린이‘는 오래도록 하늘바라기임을 털어놓는다.
나를 위한 시간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하루에 잠시라도
나에게 선물할 순간을
찾으시길 바라요.
22년간 디자인으로 돈벌이를 하며 덕업일치의 삶을 살았던 내가, 난생처음으로 즐기는 ‘취미’가 수채화다. 엽서 사이즈의 작은 그림들은 선물을 주고받기에 부담도 적다. 비전공자의 실력이라도 정성스레 손으로 그린 엽서는 손편지의 소중함과 비슷하다. 그림엽서를 받는 분들께서 기대 이상으로 기뻐해주시어 감사할 따름이다. 참, 화실 좀 다녀본 분에게는 감히 못 내밉니다요호홍홍.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해마다 동료들에게 손으로 직접 쓴 크리스마스카드를 건네곤 했다. 오랜 시간 함께 하다 보니 가족 같은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으레 홍디는 카드를 준비할 것이라 여기고, 언제부터인가 나에게도 손글씨로 답해주었다. 그간 받은 손글씨 카드들은 서랍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본다. 펜으로 쓰다가 화이트가 없어 찍찍 공사 중이면 어떠하리.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이고, 네모난 여백을 꾹 눌러 채우는 동안 나를 떠올려 준 결정체인걸.
수채화는 매력적이다. 물을 바른 종이에 물감을 머금은 붓이 스쳐가면서 번지는 방향은 우연인 듯 필연적이다. 살면서 흘러가는 인연들처럼 말이다. 물들어가는 색을 바라보고 마르기를 기다리는 자세도 살아가는 모양새와 비스꾸리하다. 서툰 붓질이지만 하늘바라기는 풍경이나 하늘을 그릴 때 그렇게 좋더라. 찰칵 담아 온 사진을 띄워놓고 귀한 순간을 떠올리며 공들여 그려내는 행위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하루에 몇 분이 아니라 백여 분을 앉아있어도 모자를 지경이었으니.
2024년 시작과 함께 처음으로 연재브런치북에 도전한다. 사진으로 담고 그림으로 물들이던 하늘을 글로도 함께 남겨보려 한다. 서랍에 넣어두고 꺼내보는 귀중한 성탄카드처럼, 잊히지 않게 글로 모아두고 싶다. 내손으로 그려낸 드로잉이 누군가에게 잠시 눈호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수채화에 담뿍 빠지고 담겨있는 이야기들이 궁금한 분 계시려나.
글도 그림도 서투른 '쓰린이'면 어떤가. '쓰른님'들 보시기에 삐뚤빼뚤해도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한글 모르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따라 그려온 '엄마 사랑해'가 울컥하듯이 말이다. 관심과 애정이 함께 한다면.
+덧마디.
'수물수매=수요일마다 물드는 수채화의 매력' 홍디의 첫 연재브런치북을 응원해 주세요.
여러분께 드릴 그림편지를 준비하는 시간은 저에게 소중한 선물일 겁니다.
그림을 그리는 모습, 배우는 자세, 대하는 마음을 한 겹씩 풀어보겠습니다.
홍디작가와 함께 하는 여러분의 소중한 몇 분이 선물을 열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선물 주고받는 기분 아시는 당신을 라이킷합니다.
(귓속말)브런치북 Like it 이 따로 있더라고요호홍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