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

by 시은

#1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함께할 거야.'


수진이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이었다. 그날 우리 집의 공기, 아내의 목소리, 표정까지 바로 어제 일처럼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아내가 아니라 형사가 앉아있었다. 그는 볼펜을 탁탁 두드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 말을 하게 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일회용 컵을 잡았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경찰의 전화를 받은 뒤부터 목이 타는 듯 말라왔다. 어느새 컵에 담겨있던 물도 다 마신 차였다.


"이혼서류에 사인하는 날이었습니다. 수진이가... 제 아내가 갑자기 그렇게 말했어요. 그때는 단순히 감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시 돌아오겠다는 의미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자를 만나지도 않았고요."

"이혼 사유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저는... 저는 수진이가 너무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 같아서 답답했어요. 친구도 없고, 저희 가족들과도 만나려 하지 않고."

"부인이 거부했군요."

"네. 그렇지만 그게 이유는 아닙니다. 이혼을 요구한 건 아내였어요.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분간 혼자 살고 싶다고만 했습니다. 꼭 이혼을 하지 않고 별거만 해보는 건 어떻냐고 했지만 아내는 뜻을 꺾지 않았어요."


형사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져왔다.


"이수진 씨는 평소 어떤 분이었습니까?"


나는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완벽했던 수진이를.


"정말 완벽한 사람이었죠. 집에서도, 밖에서도 모든 게 완벽했습니다. 저희 가족들을 안 만나려는 것만 빼면 저한테도 정말 잘했습니다. 직장은 작은 출판사였지만 그 안에서는 제법 인정받는 것 같았어요."


한심한 설명이었다. 수진이는 이런 상투적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틈이 없는 여자였다. 수진이는 우리 인생의 결말까지도 모조리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래서 나와 이별을 택한 걸지도.


"아까 친구가 없다고 하셨는데,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아예 없었나요?"

"그러고 보니 가끔, 독서모임을 나가긴 했어요. 매주 나가는 건 아니고 몇 달에 한 번 정도 간헐적으로요. 책을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습니다."


내 말을 주의 깊게 듣던 형사가 사진 몇 장을 내 앞에 놓았다.


"이 여성분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낯선, 그러나 평범한 여자들이었다. 지나가다 봐도 멈춰 설 것 같지 않은. 아마도 실종된 여성들이겠지.


"독서모임에 갔다 온 날을 혹시 기억하시나요? 대략적인 시기만 알아도 됩니다."


나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답변했고, 그 즉시 그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졌다. 몇 가지 문답 끝에 마지막 질문 순서가 왔다.


"이수진 씨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수진이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형사가 일어서며 말했다.


"조사가 더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혹시 수진 씨와 연락이 되거나 어디 있는지 알게 되시면 즉시 신고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은 온통 하얘졌다.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함께할 거야.'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2

엘리베이터 앞에서 매번 마주치는 여자가 있다. 아마도 나보다 서너 살 많을 듯 하나, 어쩌면 더 어릴 수도 있다. 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맴돌아 있고, 화장기 없이 드러난 피부에 기미가 거뭇한 탓에 내 멋대로 추측해 보았을 뿐이다.

아마 이전에도 몇 번 마주쳤을 수도 있지만, 이제야 내가 그녀를 주목하게 된 것은 그녀가 최근에 들고 다니는 책 때문이었다. 편견이라면 미안하지만 책을 읽을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책을 읽을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데뷔작을 들고 다녔다. 그것도 초판 한정본으로 말이다. 그 작품을 구하기 위해 지역에 있는 서점이란 서점은 다 돌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어제 그녀에게 말을 걸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의 집 안에 와있다. 그녀의 집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기분 좋은 향이 풍겼다.


"차 한 잔 하실래요? 좋은 차가 있어요."

"네, 감사해요."


그녀가 차를 끓이는 동안 나는 거실을 둘러봤다. 정말 책이 많았다. 대부분 문학 작품들이었는데, 내 취향과 비슷했다.


"책이 정말 많으시네요."

"네, 관심이 많아요. 꽤 오랫동안 모았어요."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차를 한 입 마시자 온몸에 따듯한 기운이 돌았다. 점점 그녀에게 호감이 일었다. 그녀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한 게 무안할 지경이었다.


"서재 구경하셔야죠."


서재에 들어서자 입이 떡 벌어졌다. 벽면 가득 책들이 꽂혀 있었다. 희귀한 초판본들도 보였다.


"와, 정말 대단해요. 구하기 어려운 책들도 많은데요."

"오랫동안 조금씩요. 실은 제가 출판사에서 일하거든요. 몇 권 골라서 빌려가세요."

"정말 그래도 될까요?"

"네, 늘 독서모임하는 분들만 초대했었는데 이웃을 초대하긴 처음이네요. 천천히 둘러보세요. 저는 잠시 전화할 곳이 있어서."


아마도 마음껏 책을 보라는 배려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한 권, 한 권 천천히 책을 둘러보았다. 전부 잘 관리된 책들이었다. 서재에는 푹신한 의자도 있고, 간단한 다과가 담긴 바스켓과 음료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다. 내가 꿈꾸던 공간을 구비하고 있는 그녀가 부러워졌다. 그녀와 친해진다면 나도 종종 이 공간을 이용할 수 있겠지, 그녀에게 말을 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은 많은 책들 중 하나를 골라, 몇 장 넘겼을 때 찾아왔다. 처음 느껴보는 통증에 나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분이 지나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간신히 문 앞까지 몸을 끌고 가 문고리를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봤지만 바깥은 조용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나는 내가 꼭 읽고 싶었던 수많은 책들이 가득한 서재에 홀로 갇혀있다. 그러나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밖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3

유난히 책을 사랑하던 아이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재 속에, 책상 앞에 틀어박혀 있으면 그녀는 행복했다. 책을 읽는 것 자체의 기쁨도 컸지만, 책을 읽을 때면 어른들이 늘 칭찬해 주는 것도 좋았다.


"어머, 이렇게 어려운 책도 다 읽네. 책 읽는 게 그렇게 좋아?"

"요즘 아이들은 책은 안 읽고 게임만 하는데, 기특하기도 해라."


그 칭찬들이 아이를 더욱 책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책을 읽을수록 어른들의 시선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친구들보다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알았고, 글도 잘 써서 교내에서 개최되는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칭찬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책만 읽지 말고 다른 공부도 해야지. 수학 성적이 너무 안 좋잖아."

"친구들과도 놀아야 하는 거 아니야? 맨날 책만 읽으면 어떻게 해. 피아노 학원이라도 보내줄까?"


엄마의 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으면 "그만 읽고 수학 문제집 풀어"라고 했고, 친구들을 사귀라고 성화였다.


아이는 친구들과 노는 법을 몰랐다. 아이가 돌아오기만을 그 자리에서 기다리며 늘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들과 달리, 또래 아이들의 대화 화제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그 이야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를 대하는 태도 역시 금세 바뀌었다. 계속해서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를 걱정하던 엄마는 결국 서재문을 잠갔다.


서재문은 일주일에 한 번만 열어준다는 엄마의 말에 아이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친구를 사귀면 다시 예전처럼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주겠다, 성적이 오르면 서재문을 열어주겠다, 엄마는 말했고, 아이는 깨달았다. 어른들의 칭찬에는 조건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조건은 본인들의 입맛에 따라 계속 바뀐다는 걸.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문학을 전공했지만 "취업이 어려운 과"라는 말을 들었고, 출판사에 취직했지만 "돈을 많이 못 벌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가자 "언제 결혼할 거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남편은 그런 질문들로부터 아이를 보호해 주는 방패막이 같은 존재였다. 그와의 결혼 생활은 처음엔 평온했다. 그는 아이의 취향을 존중해 주었고, 집에 서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가족들과도 어울려야지", "친구를 좀 만나볼 생각 없어?"


결국 남편도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 했다.


어른이 된 아이는 결심했다.


더 이상 칭찬받는 것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잘 알겠지만 취미란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기는 법이었다. 아이는 취미를 위해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도 헤어짐을 고했다. 남편은 아마도 자신의 취미를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이의 서재는 완성되었다. 누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되는, 오직 그녀만이 문을 열 수 있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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