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는 참을 수 없는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내가 만나지 말라는 친구들, 특히 P와 L을 자꾸만 만난다는 점. 둘은 빤질빤질한 얼굴만 믿고 매번 여자친구를 바꿔대고, 동시에 여럿을 만나기도 하는 질 낮은 놈들이다. 우리 집으로 이사오라는 말을 자꾸 못 들은 척한다는 점, 심지어 우리 집이 J의 회사와 훨씬 가까운데도 이상한 핑계를 댄다. 술자리에서 간혹 연락이 늦어진다는 점. 그래도 몇 가지만 제외하면 J는 그간 만났던 남자들에 비해 가장 훌륭한 물건이었다. 수없이 많은 남자를 만나봤지만 J정도 되는 물건은 찾기 어려웠다. 그만큼 세상에 형편없는 남자가 많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나도 되도록 참아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게 싸운 뒤로 서로를 존중하고, 만났을 때 사랑을 듬뿍 표현하자, 약속까지 했었다. 그 후 한동안 조심하는가 했더니 J가 또 실수를 했다. 밥만 먹고 끝난다던 회식이 벌써 열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 시간마다 보내는 내 메시지에 '조금만 더', '금방 간다'는 똑같은 답장만 돌아올 뿐이었다. 침대에 누워 SNS를 뒤져봐도, 유튜브를 봐도, 쇼핑몰을 기웃거려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J가 정말 회사 사람들과만 있는 걸까. P나 L 같은 애들과 어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님 여자직원과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면 속이 뒤틀렸다. 당장이라도 J가 뭘 하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야 집에 돌아왔다. 영상통화를 걸자 J는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사과했지만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다음날 회사에 가서도 그 생각으로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아 퇴근이 늦어졌다. J에게서는 계속 연락이 오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일은 남았지만 우선 집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지하철은 한산했다. 와중에 내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시선을 끌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가방도 비싸 보였다. 무엇보다 피부가 아주 매끈하니 잡티 하나 없었다. 이 시간에도 이렇게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다니, 직장인은 아닐 거라 추측했다. 이상한 점은 그녀가 계속 나를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며 불편함을 숨겼다.
집 앞 지하철역에서 내리려는데, 그 여자가 함께 일어났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녀는 여전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타인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조금 무서워지려는 찰나, 그녀가 불쑥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동시에 '도를 믿으시나요.' '인상이 좋아 보이세요.' 따위의 멘트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것을 예상했으나 그녀에게서는 전혀 생뚱맞은 말이 들려왔다.
"혹시 남자친구가 있으신가요?"
"네?"
아, 그쪽이었구나.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며 우물거리는 사이 그녀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아, 저는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친구분의 모든 일상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차라리 사이비가 나을 텐데 미친 사람에게 잘못 걸렸다. 어떻게 도망가야 하지,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빙빙 돌았다. 그녀의 입은 쉬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마치 AI로 만든 가짜인간 같았다. 분명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어딘가 낯선 불쾌함이 감돌았다.
"음, 쉽게 말하자면 CCTV 같은 건데, 정확히는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해요. 24시간 언제 어디서든 그분이 뭘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어요."
그래, 미친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의 마지막 말이 잠시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한 번만 생각해 보세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어제 남자친구가 정말 회사 사람들과만 있었는지."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손에 명함을 쥐어주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괜찮아요. 급하지 않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잠시 고민한 자신에게 실망하며, 명함을 보지도 않고 가방에 구겨 넣었다.
한참 그 명함을 잊고 지냈다. 그날 밤 J는 꽃다발을 들고 집에 찾아와 사과했고, 나는 못 이긴 척 넘어가주었다. 내가 그 명함을 다시 떠올린 건, J가 우리 집으로 이사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날이었다. 구겨진 명함을 펴자 제법 그럴듯하게 꾸며진 회사로고와 연락처가 보였다. 전화를 걸기 전 인터넷에 회사이름을 검색해 봤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안녕하세요."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계속 망설이면서도 결국 명함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자 친절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철에서 만난 그녀의 목소리였다.
"저... 그때 말씀하신 거 말인데요."
"어머, 마음이 바뀌셨나 보네요. 역시 매력적인 서비스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예요?"
"설치비용은 100만 원이에요. 아! 물론 설치 후에 후불로 지불하셔도 돼요. 효과를 보신 다음에 결정하시면 되니까."
"정말... 되는 거예요?"
"물론이죠. 제가 휴대폰으로 링크 하나 보내드릴게요. 아, 참 목소리는 아주 잘 들리진 않을 거예요. 그 정도는 이해해주셔야 해요."
돈은 바로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해킹일까, 해킹이라고 해도 크게 잃을 건 없었다.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가 보내준 링크를 클릭했다. 누군가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내 휴대폰 화면에 새로운 앱이 생겼다. 아이콘은 평범한 카메라 모양이었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앱을 켰다. 화면에 J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소스라치게 놀라 핸드폰을 놓쳤다. 떨어진 핸드폰 속에서는 J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J는 막 씻고 나왔는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자마자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거는가 했더니 나였다. 나와 통화를 하면서도 집안을 계속 돌아다니며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 이런 깔끔한 모습이 좋았었지. 그는 나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불을 끄고 침대에 눕더니 곧 곯아떨어졌다. 늘 잔다는 말없이 잠드는 것도 불만이었는데 확실히 자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보내준 계좌로 당장 돈을 송금했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 종일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J가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 점심을 먹는 모습, 동료들과 대화하는 모습. 모든 게 내가 알고 있던 J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남자를 내가 만난다는 사실이 뿌듯하기까지 했다. 일 등 학생의 학부모라도 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좋은 건 내가 더 이상 J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캐묻을 필요가 없었다. J도 내가 예전보다 관대해진 걸 눈치채고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요즘 자기 많이 달라졌어. 신기할 정도야. 나 이사 안 가는 거 안 섭섭해?"
"응! 괜찮아. 난 자기 뭐하는지 다 아는걸."
나는 웃으며 대답했고, 농담인 줄 아는지 J도 웃었다. 내 마음은 정말 여유로워졌다. 더 이상 J를 의심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런 평온한 날들이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그날 J는 대학 동창들과 만난다며 나갔다. 나는 집에서 편안하게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창들과 고깃집에 앉아서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술자리가 끝나고 친구들과 헤어진 후에도 J는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내게는 친구들과 한 잔 더한다는 카톡이 왔다. 그러더니 혼자서 또 다른 술집으로 향했다. 나는 더 주의 깊게 화면을 들여다봤다.
J가 들어간 곳은 이자카야 스타일의 바였다. 그곳에는 어떤 여자가 혼자 앉아있었다.
J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옆 자리에 앉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어릴 적 물에 빠진 날이 떠올랐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잠기어 가던 얼굴, 코에 들어차던 계곡물. 숨을 가쁘게 쉬며 여자의 얼굴을 확대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J를 보며 자꾸만 웃었다. 볼륨을 최대치로 키우자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헤어지면..."
"집착... 헤어지자고.... 어떻게 될지 몰라."
드문 드문 들렸지만 분명 저 여자가 우리의 헤어짐을 종용하고 있는 듯했다. 집착?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휴대폰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어느새 그들의 거리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최대한......"
J가 그 여자의 손을 잡으며 무언가 말했다. 여자는 말없이 J에게 안겼다.
더 이상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앱을 끌 수도 없었다. 마치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을 보는 것처럼, 외면하고 싶었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집을 뛰쳐나왔다.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J는 술집 앞에서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여자가 먼저 떠나고, J는 혼자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가증스러웠다. 전화는 무시하고 뒤를 따라갔다. 큰 도로 근처까지 왔을 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뒤에서 그를 불렀다.
"자기야."
그가 돌아보는 순간, 나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버렸다.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내 그는 비틀거리다가 차도로 떨어졌다. 마침 과속이었는지 속도를 조절하지 못한 트럭이 그를 덮쳤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나 무작정 뛰었다.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한참을 뛰어서 택시를 잡았다. 땀을 줄줄 흘리는 내 모습을 본 택시기가가 몇 마디 말을 붙여왔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 핸드폰을 켜자, 앱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오류인지 J의 마지막 순간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그가 돌아보는 모습, 밀려나는 모습, 트럭에 치이는 모습이 계속 재생되었다.
나는 앱을 끄려고 했지만 아무리 해도 꺼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껐다 켜봐도 소용없었다. 그가 죽는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비명을 지르며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 액정이 깨졌지만 여전히 그 장면은 재생되고 있었다.
휴대폰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이불속에 들어와 머리를 파묻었지만 영상은 머릿속에서도 반복되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J의 당황한 표정, 그가 뒤로 밀려나는 모습, 트럭의 굉음. 모든 게 선명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출근은 물론 할 수 없었다. 경찰이 나를 찾고 있을까? 휴대폰이 부서졌으니 경찰이 집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이 빌어먹을 영상을 멈출 수만 있다면.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에는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나는 CCTV의 저장장치가 되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남자를 잘못 만나서 받는 형벌치고는 과했다. 내 머리가 부서진다면, 영상을 멈출 수 있을까? 커다란 통창에서 바람이 나를 유혹하듯 불어왔다. 편안해질 수 있어, 중얼거리며 창문으로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