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직하기 전 마지막 부서에서 직속 사수였습니다. 전 과장, 선배는 차장이었고 그 밑으로 후배들이 있었지요.
저보다 나이가 못해도 4~5살은 많은 형님이니 대충 40중반은 되었을텐데...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다고 전 직장 후배들에게 들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곧 있으면 팀장이 될 것이 예약이 되어 있을 정도로 위치가 확실했던 형님입니다.
형님께 연락을 드리고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 다른 친한 형님도 불러서 같이 치킨에 맥주 한잔하였습니다.
후배였으면 다짜고짜 왜 그만두는지부터 물어봤을 텐데 앞에 아이스브레이킹 하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렇게 셋이서 만나는 것은 오래간만에 있는 일이니 이런저런 업데이트만 하는데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지요.
30분쯤 지나서 드디어 형님께 궁금함을 던졌습니다.
라구나 : 형님, 왜 그만두시는 거예요? 형님 : 너도 나 잘 알잖아. 네가 계산 빠른 만큼 나도 계산 빠른 거. 라구나 : 그렇죠, 형님이 저보다 빨리 굴러가시잖아요.
형님과 제가 함께 일한 팀이 영업팀이었기 때문에 둘 다 감적인 숫자 계산이 빨랐고 재테크 적인 면에서도 비슷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형님 : 지금 내가 마흔 중반인데... 10년 뒤를 생각해 봤거든. 그럼 그때 임피(임금피크)잖아. 형님2 : 에이, 형님 임원 하셔서 10년은 더 하셔야죠. 형님 : 그건 아무도 모르잖아.
일도 잘하고 입지도 탄탄하신 분인데도 임원에 대한 생각은 저와 비슷하십니다. 임원이 되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임원'이라는 Lever로 인생을 10년 더 계획한다는 것은 '로또' 복권 당첨되면 그 돈 어떻게 쓸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직장인에게 '임원'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찾아오는 행운 정도로 생각함이 바람직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니까요.
라구나 : 형님, 그래도 XXX 부장님처럼 팀장 하다가 부장 팀원으로 내려와서 정년퇴직하는 것도 멋진 삶이잖아요. 형님 : 그렇게 생각해? 라구나 : 그쵸 형님,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참고 견디는 삶도 멋진 거잖아요. 형님 : 그것도 맞지만,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
가끔 제 주위 사람들이 저한테 그만 좀 성장하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저는 다른 사람의 인사이트를 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형님이 하신 말씀이 갑자기 오함마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머리를 강타해왔습니다. (실제로 오함마로 맞으면 죽겠죠...?)
형님이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형님 : 나는 내가 55살에 임피로 팀장 내려오면, 그 모습이 멋지진 않을 것 같아. 내 아들에게도 나는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거든. 근데 XXX 부장님처럼 그냥 시간만 때우고 있는 모습을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멋이 없어, 멋이.
실제로 외모로도 멋진 형님이시고 평소에도 멋을 강조하는 형님입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지만 강남에 좋은 재건축 아파트를 가지고 계신 형님입니다.
보통 가족이 생기면 '가족'을 생각해서 '자녀'를 생각해서 '나'에 대한 여러 가지를 포기하곤 합니다. 정해진 Cash Flow 중요한 사람 위주로 분배를 하다 보면 '나'에 대한 몫은 줄어들기 마련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월급으로 500만 원을 버는데 자녀들이 생기면 자녀들 학원비, 식비, 의류비 등 자녀들을 우선순위로 두면 내가 쓸 수 있는 몫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우선순위가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형님은 가족보다 형님을 더 우선시 생각을 하십니다. 이게 해석을 잘 해야 하는 포인트인데요...
형님은 가족을 위해서 내가 '희생'한다는 마음보다는 내가 더 잘 되고 내가 더 도전을 해서 본인이 더 멋진, 쉽게 말해서 돈을 잘 버는 아빠가 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자존감이 높으시고 본인이 당당한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저에게는 이 부분이 상당히 울림이 있었습니다.
라구나 : 형님, 약간 형님 말씀하신 게 충격이네요. 형님2 : 그러게요, 형님이 이런 생각으로 그만두시는지는 몰랐어요. 형님 : 나도 이제 40 중반이고, 연말에 혹시라도 팀장이 되면 더 이상 도전은 어려울 것 같더라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
형님은 개인의 성과에 따라 성과급 변동이 심한 회사로 이직을 하신다고 합니다. 사실상 프리랜서와 같은거죠. 대기업 팀장으로 안정적으로 10년이 보장되지만 10년 뒤에 찾아올 자기의 모습이 싫어서 큰 도전을 하신 것이지요.
라구나 : 형님, 근데 보통 그런 회사들이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잖아요. 혹시라도 잘못되면 플랜 B를 생각해 보셨어요? 형님 : 그치,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래서 Plan B, C, D, E 등등 생각을 해놓은 것도 있고 준비한 것도 있고. 이직하기 전에도 이직 말고 다른 사업도 생각한 게 많아.
그리고 형님께서 그동안 생각하신 여러 가지 사업 아이템과 실제로 준비한 내용들을 일부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저도 형님2도 그 이야기를 듣고 한 가지 아이디어는 너무 괜찮아서 같이 도전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연 내로 달성하면 블로그에 공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형님들과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에 마른안주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하다가 느지막하게 집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연말에 다시 한번 보자는 약속과 함께요.
미생이 유행한 이후로 이런 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회사 밖은 지옥이야"
이 말의 두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무 준비 없이 회사 밖으로 나가면 지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또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너무 구체성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가서 새로운 것을 하면 당연히 안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홍보가 안되면 버티지 못해서 망할 가능성이 높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도 인적 인프라가 없으면 아무 손님도 찾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분이 더러워서 '에라잇 내가 더러워서 그만둔다'라고 감정적으로 그만두고 치킨집을 차리면 당연히 안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지요.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회사에서 쌓아둔 인적 인프라를 활용하거나 빈틈이 있는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나오면 해볼 만한 것이지요.
두 번째는 회사 밖은 지옥이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회사 밖은 너무 무섭기 때문에 절대 회사를 나가지 말고 끝까지 버티라는 것도 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 역설적으로 회사 밖에서 할 것을 끊임없이 찾고 고민하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사라는 곳은 언제든 우리가 쓸모가 없어지면 충분히 내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회사는 괜찮아, 안 무너져"라고 하기에는 우리나라에는 '대우'라는 아주 좋은 예시가 있습니다.
IMF가 다시 안 올 수도 있지만 그와 비슷한 위기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습니다.
대기업이라는 튼튼한 울타리만 믿고 있기에는 오히려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튼튼한 울타리를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체력과 기술을 구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형님은 튼튼한 울타리를 벗어나 20년 가까운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면서 충분한 체력과 기술을 갖춰서 '지옥'으로 나가보는 듯합니다.
회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는 것이지요. 안정을 위해서는 오히려 변화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