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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중지추 May 27. 2024

크레파스 단상

아이가 영어공부와 독서에 집중해보겠다며 디 데이를 매일 쓰며 생활하고 있다. 거기에 조금이라고 응원을 보탤까 싶어 나도 같이 디 데이를 매일 아침에 써서 거실에 붙이고 있다. 오늘은 D- 85일이다.  


근 2 주 동안, 저녁마다 A4 용지에 색연필로 디 데이를 쓰고 거기에 색깔을 입히고 있다. 하다 보니 매일 매일 다른 색이다. 은근히 재미가 있다. 일주일 단위로 붙이고 있다. 지난주의 디에이 일곱장을 나란히 펼쳐서 붙이다. 그  위에 이번주 일곱장을 붙이는 식이다. 그러고 보니 매일 매일 다르게 색칠하고 있는 모양새가 한눈에 보이는 것이 거실 분위기를 살리는 효과도 있다.


어떤 날은 노란색을 주로 쓰고, 또 어떤 날은 연두색을 주로 쓰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황토색과 연두색과 노란색을 섞어서 쓰기도 한다. 지난 날에 색칠한 종이를 보면 조금이라고 다르게, 조금이라고 더 부드럽게, 조금이라고 더 돋보이게 하려고 애쓰게 된다. 


이주동안 하다보니 내가 이렇게 색칠하는 행위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색칠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은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는 걸 발견했다. 어제는 강남 교보문고에 가서 내친침에 컬러링 북을 한권 샀다. 

컬러링 북으 사려고 보니 책마다 다 주제가 있었다. 나는 그 중에 빨간 머리 앤을 골랐다. 쉬워보이기도 했고 어린시절 빨간 머리 앤을 읽고 좋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12색 색연필로는 다 표현을 못할 것 같아 36색 색연필도 같이 샀다. 마친 50% 세일을 하고 있었기에 효용이나 실용성을 따지지 않고 그냥 사버렸다. 


뚜껑을 열어보니 총 천연색 무지개처럼 하얀색부터 검정색까지 그라데이션되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만의 그림도구를 가지게 된건 생애 최초라고 할 수 도 있겠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에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었다. 하지만 한번도 제대로된 크레파스가 없었다. 오빠가 가져가고 동생이 가져가고 남은 꽁다리 크레파스가 항상 내 차지였다. 내 크레파스엔 다른 색깔의 크레파스가 묻어 있었고, 그나마도 색깔이 다 없어서 가지고 있는 색 정도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학교 선생님은 그런 나를 준비성이 없다거나 성의가 없다는 말로 혼낸적도 있다.  그 분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속상하다거나 나의 마음을 몰라줘서 섭섭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에게 떴떳했다. 형편이 어려운걸 뻔히 하는데 크레파스를 새거로 사달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상 서럽 구석에서 굴러다리는 크레파스를 모아 준비물을 챙기는 것은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결핍이 나를 나아가게 한 거 같다. 더 이상은 결핍으로 인해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 노력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결핍을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에 열심이 살았다. 

 당시와 지금은 40년의 차이가 있다. 물질은 더 풍요로워졌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더 많아졌기에 수평적 비교는 불가능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결핍이 나를 나아가게 하는게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삶이 나를 나아가게 한다.  나는 더 풍요로워지고 싶고 더 행복해지고 싶고 더 잘살고 싶다. 이런 욕구는  내 마음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거부할수 없는 느낌인것 같다. 멈추고 싶지 않은 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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