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바운더리 - 그게 무엇이고 어떻게 두는지 단계별 방법.
심리적 바운더리는 말 그대로 경계선 -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을 구분합니다. 건강한 바운더리는 자아와 외부를 분리시켜서 우리를 압박하는 많은 목소리와 눈빛 사이에서도 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명확히 알아차릴 수 있게 합니다. 위험에선 나를 지키고, 내 감정과 생각을 존중하며, 안전한 관계에선 경계를 풀 줄 아는 - 나 자신과의 믿음의 메커니즘입니다.
내 바운더리를 지킨다는 건 뭘까요?
나의 입장과 행동계획을 확고하게 하고, 그걸 상대방에게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게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나를 아프게 하는 상황에 맥없이 휩쓸리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이에요.
불안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들은 바운더리가 매우 약합니다.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그게 사랑인 줄 착각하는 불안형은 나와 너의 경계가 모호해요. 상대방의 감정도 내 것처럼 생생히 느끼는 경우가 많고, 상대방의 행동과 상황에 몰입해 내 삶은 뒷전이 됩니다. 희미한 바운더리는 남에게서 나의 자아를 보호하지 못해요. 남들은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전쟁통 사이에 홀로 속옷차림으로 나와있는 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의 욕구를 소통했을 때 상대방이 날 귀찮게 여기고 떠날 거 같아서” 내 욕구를 소통 못해요.
반대로 회피애착유형은 과도하게 바운더리를 긋습니다. 방어심과 적대심에 세상 누구도 자신의 깊은 곳까지 허락하지 않으려는 회피형은 그래서 차갑고, 감정이 무디고, 공감도 잘 못합니다.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폐쇄해요. 다들 말 타고 전쟁하는데 그 전쟁통 중간에 혼자 탱크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에요. “어차피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을 텐데. 괜한 기대 했다 또 실망할바에야 애초에 말을 안 하고 피해버릴래”하는 마음에 입을 닫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건강한 관계에선 서로 동등하게 맞춰가는 타협이 필수잖아요.
내가 바라는 걸 말하는 건 사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어렸을 적 니즈를 충족받지 못한 확률이 큰 불안정애착유형들에겐 더 무서워요. 소통을 했는데도 상대방이 들어주지 않을 때 느낄 자괴감과 익숙한 비참함. 소통했다가 싸움으로 번질 때 느낄 후회와 지침. 이 모든 걸 무의식에 염두 두는 우리에겐, 차라리 내가 참고 말지가 지금 당장으론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나를 뒷전으로 두는 습관은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참혹한 결과를 일으킵니다. 나중에 나의 목소리를 들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너무 오래 침묵시킨 내 감정들이 이젠 더 이상 들리지 않을 수도 있어요. 웅성웅성 타인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내 목소리가 파묻히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이어폰을 끼고 볼륨 크게 노래를 듣다 빼면 잠시 세상 모든 게 잘 안 들리잖아요. 계속 볼륨을 높게 듣다 보면 소음성 난청의 위험이 올라가겠지요. 듣고 싶어도 내 목소리가 더 안 들리기 전에, 당장 지금 주위의 소음에서 내 감정, 내 생각 - 나의 목소리를 적어도 구분하려 해 주세요.
남들에게 휩쓸려서 내가 나의 행복을 희생시켜 왔다면 - 그건 상대방에게 화낼 것이 아닙니다. 넌 나쁜 사람이야라면서 탓할게 아니에요. 내가 먼저 괜찮다고 했잖아요. 상대방의 도 넘은 행동들에 아무 대응을 하지 않는 건, 암묵적으로 난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란 허가를 내린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날 나 대신 지켜줄 수 없어요.
상대가 내가 제시한 선을 계속 존중하지 않는다면 떠날 줄 알아야 합니다. 막 크앙 넌 나쁜 사람이야!! 화내면서 관계를 끊기보단
"내가 바라는 사랑은, 이런 식으로 나를 대접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아무리 너란 사람과 정이 들고 사랑을 품고 있더라도, 너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거나 지금은 타이밍이 아닌가 봐.
그 누구도 내가 아픈 걸 감수하면서까지 붙잡지 않을 거야."
이런 느낌으로 바운더리를 두는 걸 추천합니다.
바운더리는 협박용이 아니에요. "내 요구에 응해주지 않으면 헤어져버린다, 퇴사해 버린다" 이런 조건걸기를 진짜 헤어질 마음도, 떠날 마음도 없는데 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상대방이 내가 아무리 타협하려 노력하고 내 입장을 설명해도 맞춰나갈 노력을 안 한다면, 정말 난 내 발언대로 떠날 것이란 걸 굳건히 마음먹지 않은 상태에서의 바운더리는 상대를 조종하려는 협박이 될 뿐이에요.
또 갑을/상하관계 같은 어조로 나가기 쉬워서 상대에게 메시지의 본질을 흐리고 거부감만 들 수 있기도 하고요. 바운더리를 둔다고 상대방의 안위는 생각 없이 내 마음대로 질러버리는 거 아닙니다. (전 그랬거든요..)
1. 상대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 느껴지는지:
e.g. 네가 가끔 잠든단 연락 없이 사라지는 게 날 많이 불안하게 해.
2. 필요/관계에 따라선 왜 이게 나한테 특히 더 힘든지:
e.g. 어렸을 때 버림받은 기억 때문에 난 소중한 사람과 예고 없이 연락이 끊기면 자동적으로 버림받은 거란 쪽으로 생각이 가버리네. 당연히 나도 이런 순간에 사실이 아닌걸 나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우리의 관계를 믿으려 할 거지만, 이왕이면 자기 전엔 연락해 주면 내가 훨씬 더 마음 편안하게 널 사랑할 거 같아.
그리고 소통을 안 하면 상대가 내 바운더리를 지켜주고 싶어도, 날 잘 사랑해주고 싶어도, 내가 어떤 사랑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으니까 상대는 해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소통했는데도 노력 안 하는 관계는 굳이 부득부득 연을 이어나가려고 안간힘 쓰지 마세요. 우린 그것보다 더 좋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요.
어차피 자기 사랑 없이 있는 건 상대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 아닙니다.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에요 (참고글: 나를 사랑 못하면 남도 사랑 못 하는 이유;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집착/결부; 의존).
나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두는 바운더리는 후회를 남길 수도 있어요. 상대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크면, 솔직히 굉장히 불공평한 요구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자기 사랑 없이 두는 바운더리는 타인에게 내가 나 자신에게 해줘야 할 것까지 바라게 된다던가 (그리고 그게 합리적이란 착각하면서), 아니면 너무 단단한 벽을 쳐놓고 건강한 정도의 친밀감을 바라는 상대에게 왜 내 바운더리를 넘어오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운더리를 두는 과정은 분명 나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과 동행돼야 합니다. 결국 내가 나를 이해하고 나를 알아야지만 상대에게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본적으로 자기 객관화, 내면의 자아와 소통을 가능케 하는 자기 사랑은 필수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하지만 나 역시 날 사랑하려 자아성찰을 한 지 오래라면, 이번에 내가 이해해야 할 것은 결국 관계 안에서 절대적인 맞고 틀림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 일부러 연애를 쉬면서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 시간 중 상당 부분을 바운더리를 두는 연습을 하면서 보냈지만 새로운 인연이 찾아와 관계를 맺었을 때, 상대방의 상황에 지나친 포용과 이해를 나 자신에게 강요했습니다.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는 상대방의 현실적인 상황,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라서 자기 사랑이 부족한 그였기에, 표현이 너무나 부족해도 사랑을 몰라서, 여유가 없어서라고 넘어갔어요. 그의 상황이 너무 마음 아팠고 더 듬뿍 사랑으로 적셔주고 싶단 마음에 오래 관계를 끌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를 사랑하는 건 내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게 되었어요. 나를 사랑하는걸, 내가 바라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그를 사랑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상대방에게 원망이 쌓여갔지만, 그는 한 번도 제게 이걸 부탁한 적 없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저버린 것뿐이었어요.
그리고 오만한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자기 사랑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이유가 돼주고 싶단 마음 (자기 사랑이 먼저여야 하는 5가지 이유). 표면적으로 들은 그의 과거만으로 그의 행복을 내 마음대로 지레 추측한 거. 사실은 그가 내가 바라는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내 결핍의 선택을 이타심이란 포장에 고이 싸놓은 것이었달까요.
나한텐 내 바운더리 말곤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 우린 절대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완전한 진실은 없어요. 그래서 나는 내 입장을 진심으로 여기고 믿어줄 수밖에 없더라고요. 상대의 부족한 애정에 온갖 핑계는 다 대줬지만, 결국 "나는 너와 있어도 너무 외로워"하는 제 마음만이 선택을 내리는데 중점이 돼야 하는 "저의" 진실이었던 거처럼요.
여기서 자기 사랑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먼저 나에게 주고 있어야지 내가 바라는 게 적절한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어요. 내가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상대에게 의존하며 사랑을 갈증하면이걸 바라는 게 맞는 건지 나조차 헷갈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내가 나를 가스라이팅하기 쉬워져요.
처음 바운더리를 둘 때, 악을 쓰고 칼날을 휘두르는 느낌으로 바운더리를 둘 때가 많아요. 지금까지 약한 바운더리에 억눌러 희생해 온 게 억울해서. 누군가가 내 바운더리를 무시하면 엄청 분노하며.
근데 정말 바운더리가 자리 잡히면 오히려 불필요한 감정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누군가가 내 바운더리를 맞추지 않는다면 화내지 않고 "그냥 그런가 보다"가 됩니다. 좀 기존쎄가 되더라고요. 우린 지금까지 선택받기 위해 내 바운더리를 없애거나 과하게 쌓아 올려왔잖아요.
이젠 선택하는 입장이 되세요,
나는 나에게 맞는 사람들을 삶에 들여놓는다는 마음가짐 - 소중한 나와 너를 위해, 우리가 건강한 소통이 불가능한, 다른 기준을 가졌다면 관계를 보류한다는 마음으로. 상대가 틀려서도 아니고, 못나서도 아니라 그냥 안 맞아서. 선택한다는 건 내가 남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내 곁에 어떤 상황을 허용할지는 깐깐하고 기준 높게 해야 해요.
넌 못나서 내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가 아니라 - 너의 행동은 내가 바라는 것과 엇갈린다. 이 기대치를 서로 맞춰주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은 연이 아니네.
바운더리는 상대방에게 무조건 내가 바라는 모습이 돼 달라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애걸복걸 매달리며 부탁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다 사람들 다 떠나는 거 아닌지 걱정된다면 - 애초에 주위에 나와 맞는 사람들이 없었던걸 수도 있습니다. 내 바운더리와 소통방법이 건강하단 전제하에, 내가 나의 바운더리를 그었을 때 상대가 에잉 귀찮아하면서 떠나버린다면 - 아마도 내 약한 바운더리를 이용하고 있었을 확률이 매우 매우 높아요. 가끔 이 상대는 가족, 연인, 아주 오랜 친구같이 소중한 인연일 수도 있는게 너무 아프지만요.
그래요, 잠시 옆에 아무도 없을 수 있어요. 하지만 꿋꿋이 나를 선택해 나간다면, 마찬가지로 나를 존중하고, 내가 나에게 주는 만큼의 배려와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요. 나 역시 나한테 그런 마음을 주니까 상대방에게도 줄 수 있고요. 떠난다면 - 아, 내 불건강한 바운더리에서 자신의 이익을 보는 사람이었구나, 나도 그런 마음으로 곁에 있는 건 싫다 하며 마음 편하게 보내주세요. 새로운 마음과 기대에 부응할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날 거예요.
바운더리는 솔직히 밸런스가 중요하다 보니까 바로 안정되진 않아요. 제대로 된 바운더리를 보지 못하고 자란 우리는 처음에 당연히 혼란스러울 거예요. 특히 오래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면 더 힘듭니다. 내 입장이 뭔지도 처음엔 잘 모르겠고,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내가 제시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잘 모르겠고, 만약 사람들이 떠나간다면 패닉 하는 마음에 내 욕구를 다시 저버리고 돌아갈 수도 있어요. 실제로 저도 여러 번 왔다 갔다 했고요. 몇 년에 걸쳐서.
그래도 계속하세요. 언제부턴가 감이 옵니다. 아, 난 과한 걸 바라는 게 아니구나. 내가 바라는 걸 가질 수 있구나. 내 바운더리는 여기구나.
바운더리를 너무 강압적으로도 둬보고, 내 바운더리를 잃어보기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날 보면서, 내가 점점 나를 믿기 시작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