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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선 Sep 17. 2023

바람피운 남자친구와 배운 것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 의존


난 너 없으면 안 돼. 네가 필요해.
서로의 절절한 사랑을 깨닫고 흔히 내뱉는 말이다.
이거, 정말 로맨틱한 거 맞을까?


두 번째 연애를 한 상대방은 바람(비슷한걸) 피웠습니다. 제 어릴 적 트라우마와 너무나 근접해 절대 용서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떠났을까요?

아니요, 못 떠났습니다.

한차례 미친 듯이 화를 낸 후 말론 그를 용서하고 잠잠히 지내다 불쑥불쑥 생뚱맞은 무언가가 그 기억을 건드리면 전 폭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용암을 뿜어대는 저에게 그가 말했어요:

너, 나의 행동이 절대 도저히 용서되지 않으면 넌 나와 끝내야 한다고.

이 관계를 이어가겠다고 정했으면, "우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으면, 그 사건을 계속 들먹이며 매번 이렇게 미친 듯이 폭발하면 안 된다고.


당시엔 기가 찼습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했지만 생각할수록 그가 옳았어요.

함께 있어도 저의 자존감은 점점 갉아졌고, 미움은 차올랐고, 계속해서 그에게 죄책감을 심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믿음이 이미 무너졌다면, 상처가 감당 안됬으면, 그 관계를 놓는 게 맞았습니다. 그와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했다면 떠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거예요.

지금 당장은 용서가 안 된단 걸 알고, 그 상황과는 별개로 그 사람 자체가 소중하면, 거리를 두고 나를 돌보고 서로를 더 할퀴지 않는 선택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제가 내린 결말은 "내가 잊으려 노력하겠다"였어요.


사랑해서 관계를 놓지 못한 게 아니었어요.

전 저를 믿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시절 외딴 땅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던 전, 그 없이 혼자 남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그의 존재에 제 안전을 의존했고, 그의 행동은 제 행복과 자존감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러다 이게 정말 사랑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나를 필요로 해, 날 떠나지 못하는 사랑’을 받는 걸 항상 꿈꿔왔지만, 그걸 주는 입장이 되고 그것의 근본은 사랑이 아니라 의존/사용인걸 직시하니, 이런 사랑은 받고 싶지 않더라고요.


물론 의존은 사랑과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이 버티기 힘들고 고된 세상에서 무조건적인 내편, 내가 잠시 기대 쉴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하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내가 나에게 먼저 기댈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감정, 내 생각들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줄 모르는 상태에서 타인에게 이 역할을 쥐어주면 안 돼요. 그 책임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전가할 때 사랑을 가장한 의존이 시작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기반 없이 타인을 사랑하면 그건 의존으로 변질되기 너무 쉽습니다.


아픈 사랑을 자꾸 반복한다면,

관계를 놓아야 한단 걸 머리로는 알아도 행동으로 옮기기 너무 힘들다면,

그게 정말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이 사람에게 내 무언갈 의존하고 있진 않는지 되돌아보고,

그걸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상대의 존재와 칭찬에 내 자존감을 의존한다? 그렇다면 집중해야 할 팩트는 '타인에게 나의 가치를 확인받아야 할 정도로 난 나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구나'입니다.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버려가며 누군가를 붙들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장담합니다 - 타인에게 의존하던 것들을 제가 저에게 주면서 느낀 자기 사랑은, 지금까지 받아본 그 어떤 사랑보다 든든하고, 따듯하고, 확신이 드는 새롭고 소중한 무언가였습니다.

아무도 나만큼 나를 잘 사랑해주지 못해요.

우린 밖에서 내가 필요한 걸 구걸할 필요가 없었어요. 나 자신이 있잖아요 :)


2017? 2018년..? 에 그린 거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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