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알고리즘 1: 불안애착과 회피애착 둘 다 돼 보고 느낀 점
불안애착유형은 정말 사랑에서 약자일까? 회피형은 왜 이렇게 이해 안 가는 행동만 할까?
관계 안에서 불안형도, 회피형도 되어보니 느낀 점이 있다.
회피애착유형이었을 때 난 관계 안에서 강자 같아 보였다. 평생 바라고 바랬던 “덜 사랑하는” “차가운” 갑이 되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내가 주는 것보다 더 받으면, 여러 명을 '옵션'으로 두면, 드디어 안전할 거란 착각은 점점 더 피폐해지는 내 감정이 부인해 주었다.
의심으로 똘똘 뭉친 나의 갑옷을 허무는 사람이 나타났을 땐 미칠듯한 두려움에 잠식됐다. 정말 좋아하게 될 거 같은 사람, 실망에 익숙한 나에게 자꾸 놀랍도록 확신을 주는 사람한테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진짜 이러다간 또 사랑을 기대할 거 같은데, 내가 봐온바론 사랑을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회피애착유형 중 많은 사람들이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느낌으로 연애를 한다. 딱히 끌리지 않아도 만나기도 하고,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딱히 기대하는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다.
이미 내가 제일 믿고 사랑하는 사람도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게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 부모님 중 한 명이 외도했을 경우, 외도로 인해 다른 부모가 힘들어하는 걸 본 경우같이.
가정을 꾸릴 만큼 대단한 사랑도 저렇게 처참히 무너지는데, 내 사랑이라고 다를까.
난 정말 간절히 사랑받고 싶었지만, 이미 오래 저버린 믿음은, 사랑에 기대를 거는 것이 망상이라고 느끼게했다. 지독하게 외롭지만 난 사랑 같은 걸 믿지 않고, 너도 언젠간 나의 신뢰를 어길 테니까. 그래서 얕은 관계만을 연연했다.
나는 '갑'이 아니었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난 회피애착유형이 되어있었다.
방어심과 적대감에 남들과 나 자신을 상처 내도 나 몰라라 했고, 왜 그런 선택들을 내리는지 전혀 이해 못 했다. 회피형들은 대부분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걸 피하니까. 미래가 보이는 관계를 망치고, 타인과의 깊은 감정교류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나는 것에 대한 묘한 안정감을 가지며,
사랑받고 싶은 마음, 하지만 차마 놓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공포가 얼기설기 얽혀 어리석은 선택들을 내려왔다.
일단 불안애착유형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멈춰야 한다.
불안애착유형으로써 난, 내가 주고 또 주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불안애착형은 꽤 헌신적이고 상대에 온 집중이 쏠려있긴 하니까.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고 내 생활보단 관계를 우위에 두었다.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를 곱씹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하지만 그게 사랑 아니야?
왜 내 하루하루는 온통 너로 물들었는데 네 하루는 그런 것 같지 않은지 - 싸움은 대부분 내가 서운한 걸로 시작됐었다.
모든 불안형이 이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상대에게 사랑을 닦달했었다. 굉장히 구체적인 (내 결핍을 채워주는) 사랑을 상상하곤, 현실이 기대와 다르면 어떨 땐 울고, 어떨 땐 화내고, 어떨 땐 이별을 들먹이며 관계를 내 입맛대로 재단했다. 나의 모든 자존감과 가치를 상대방 손에 쥐여주곤 안절부절 불안에 떨었다. 나 자신이 충족시켜야 하는 자기 확신까지 상대방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했던 거였다.
그리고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행동, 말투 하나하나가 상대를 매번 크게 흔든다면 어떻게 자유롭게 상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꾸 상대가 나로 인해 상처받는다면 얼마나 불안할까?
그때 깨달았다. 나는 상대방을 내 에너지로 침식해 왔구나. 내 불안을 상대에게 떠넘겼구나.
숨 막혔겠다.
너무 무거웠겠다.
외면해온 과거의 상처들이 조금이라도 트리거리면 나는 무너져 내렸고 상대에게 책임을 물었다. 내 상처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사랑한다면 당연한 행동 아니야?"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걸 상대방 탓으로 돌렸다. 나조차 나를 몰라서 아무 방향도 못 가르쳐주는데 어떻게 타인이 내 결핍이 치유될 만큼 날 '잘' 사랑해 줄 수 있다 생각했을까?
상대방은 이걸 사랑이라고 느꼈을까?
반대편에서 이런 사랑을 받아봤다. 사랑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상대가 나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데, 분명 내가 그의 삶에 큰 영향력 있는 인물인 거 알겠는데, 이상하게 그가 나를 보고 있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란 사람을 사랑한다기보단 그가 부여한 나의 의미가 더 큰 느낌?
나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필요한 느낌.
그 관계는 계란껍데기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 긴장됐고, 진 빠졌다.
내가 먼저 자진해서 상대에게 '나'를 쥐어주고, 내 마음을 어떻게 다루나 노심초사 지켜보며, 내가 바라는 모습과 다를 땐 절망했다. 상대방이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지, 나한테 중요한 게 다른 사람에겐 아닐 수도 있단 걸 망각한 채 온전히 내 기준으로만 사랑을 측정했다. 내가 원하는 표현을 바라는 건 당연하지만 문제는 내가 나에게 주는 거 없이 모든 걸 상대방이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받아도 받아도 부족하고, 주는 사람은 점점 지쳐간다.
극반대 같아 보이는 불안형과 회피형은 서로 자석처럼 끌립니다. 이 사랑은 대부분 상처로 끝나구요.
다음글에서 불안형과 회피형의 연애에 대해 다룹니다.
불안정 애착유형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다룬 글 링크: 불안애착유형, 회피애착유형 그리고 혼란애착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