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리지만 정성스러운 커피 한 잔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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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구도심에 위치한 아파트이다. 오래된 동네이지만 새로 건축된 아파트들이 많다 보니 그 아파트들 주변으로 낡고 얕은 상가 점포들이 많이 있다. 새 아파트에 입주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조금씩 인구가 늘면서, 오랫동안 사람이 안 다니던 거리와 비어 있던 낡은 점포들에 작은 식당, 커피 가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생긴 것은 단연코 프랜차이즈 커피가게이다. 저렇게 한 번에 여러 개가 생겨도 되나 싶을 만큼 다양한 커피 프랜차이즈가 들어왔고, 장사가 안 되어서 벌써 '임대' 현수막이 붙은 곳도 생겼다.
얼마 전, 아내가 출근하는 길에 있는 집 근처 C프랜차이즈 커피 가게 옆에 간판도 제대로 안 보이는 또 다른 커피가게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거기에 커피집이 있다고?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아내 역시도 C프랜차이즈 커피에 들르려다가 바로 옆에 있는 가게가 커피집인 것을 보고 호기심에 들어가 봤다고 한다. 젊은 남자 사장님 혼자서 하는 곳인데 정말 생기 없는 얼굴로 손님을 맞더란다. 아메리카노 가격은 3000원. '바로 옆에 있는 C프랜차이즈는 보통 1500원인데 여기는 3000원이면 누가 사 먹나...'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도 들어왔으니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사장님이 느릿느릿 커피를 내려서 바쁜 출근시간에 속이 타더란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옆 프랜차이즈는 벌써 몇 명의 손님이 다녀가고 있는데 여기는 아내 외에는 한 명도 없다가, 그나마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것 같은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서 "커피 한 잔!"을 외치고 나가더란다. 커피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바로 옆에 C프랜차이즈가 있어서 이렇게 팔면 하루에 몇 잔이나 팔려나 걱정이 되더란다. 유난히 자영업의 폐업이 많은 요즘이기에 자영업을 하는 남편이 생각나 망하지 않고 오래 버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오늘 아침, 차에 시동을 거는데 갑자기 그 가게 생각이 났다. 그래서 늘 출근하던 길이 아닌 그 커피 가게가 있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조금 늦은 출근 시간이어서 그런지 잠깐 정차할 수 있는 커피 가게 앞 도로는 비어 있었다. 앞에 가던 차 한 대와 내 차가 정차를 했다. 앞 차는 C프랜차이즈 앞에, 내 차는 그 가게의 앞이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당연하게 C프랜차이즈로 향할 줄 알았던 앞차의 운전자가 나와 같은 커피가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분은 늘 방문하던 것처럼 들어와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음료를 주문하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사장님께 텀블러를 건넸다. 아내의 말대로 숫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젊은 남자 사장님이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사장님이 커피를 정말 정성스럽게 준비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커피 가게에 갔을 때와는 다르게, 사장님은 텀블러에 미리 뜨거운 물을 담아서 용기를 데워 두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었다(나중에 텀블러를 데웠던 물은 비우고 새로 뜨거운 물을 담았다). 포터필터에 담긴 원두가루도 대충 탬핑을 하고 머신에 끼우는 것이 아니라, 니들 디스트리뷰터를 이용하여 원두입자를 섞어주고 나서 느리지만 정성스럽게, 너무 과하지 않은 힘으로 눌러 높이를 맞추고 커피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커피는 옆에 있는 C프랜차이즈에서 나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뭔가 포근하고 좋은 맛이었다. 이래서 오래 걸렸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정성을 들인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게 해 준 사장님에게 고마워졌다.
운전을 하며 한 모금씩 마시면서 커피가 정말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000원이라는 가격이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든다. 대단한 미각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뭔가 텁텁하고 시큼해지는 커피들과는 달리 처음에 마셨던 그 맛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출근을 해서 내 방에 들어오니 공교롭게도 직원이 커피 한 잔을 사다 주었다. 치과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의 아메리카노이다. 한 모금 마셔보니 나쁘지 않은 익숙한 맛이지만 뭔가 아쉽다. 방금 마신 맛있는 커피의 느낌이 사라질까 아쉬워 직원이 준 커피는 잠깐 내려놓았다.
간판도 잘 안 보였던 작은 커피집이 오랫동안 잘 되면 좋겠다. 싸고, 빠르고, 편리하지만 뭔가 아쉬운 것이 많은, 점점 더 사람의 온기가 사라져 가는 것보다는, 느리고 조금 비싸더라도 정성이 가득한 것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주면 좋겠다.
당분간은 조금 돌아가더라도 출근길이 바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