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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담장 위 하얀 찔레꽃 11화

by 향기로울형

11화 어른이라는 절벽

미연은 학교에서 전화를 받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학 시간에 교실을 나갔던 성우가 4교시는 물론 오후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CCTV에는 성우가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그 장면을 본 순간 지난해 뉴스에 나왔던 어느 고등학생의 마지막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미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같은 반 아이가 성우에게 가보겠다며 따라갔다는 말로 담임선생님은 미연을 위로했다. 그랬다면 휴대폰이라도 들려 보내는 것이 좋았을 것을.

아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미연은 무작정 숲을 헤맸다. 길은 왼쪽으로 가면 군부대가 있었고 오른쪽으로 가면 시내로 가는 지하철역이 있었다. 산을 넘어가면 다른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가면 북한산 야영장까지… 길들은 열 갈래도 넘었다. 어느 곳으로 간 것일까. 커다란 나무가 보일 때마다 튼튼한 대피소 기둥이 보일 때마다 미연은 끔찍한 상상에 시달렸다. 외롭고 힘들었다. 이 순간 아무도 자신의 곁에 없다는 것이.

한번 시작하면 지는 법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미연은 오히려 누구를 이겨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시달려왔다. 학생 시절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고 학과는 담임선생님이 권하는 대로 갔다. 대학에 가서는 원하는 과정을 이수하지 못했고 적당히 타협했다. 그때마다 마음에는 오기가 쌓이고 쌓여 정작 직장에 가서야 뒤늦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을 다시 갔고 직장도 다시 구했다. 그렇게 돌아 돌아가는 동안 늘 미연의 마음속에는 첫 단추, 대학을 잘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대학을 잘 갔더라면 20대와 30대 초반을 그토록 고단하게 살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남들처럼 축제도 즐기고 사회 초년생이 누리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삶을 살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미연은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를 모두 개선하여 성우가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잘난 아들을 둔 뿌듯함?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때의 기분 좋음? 없다고 말 못 하겠다. 하지만 맹세코 그것은 현상일 뿐이지 미연의 마음속에 깃든 목적은 아니다. 미연은 생각했다. 너는 나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다고.

‘그런데 그게 너를 이렇게 궁지로 몰았던 거니? 성우야? 제발 돌아와 줘.’

미연은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되는 줄도 모르고 자신이 걸었던 길을 되짚어 걷는 줄도 모르고 갈팡질팡 숲을 헤매고 있었다.


“너는 좋겠다. 좋아하는 게 정해졌으니까.”

재영이가 노래를 흥얼거리자 성우가 재영이를 보며 말했다. 재영이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하는 건 정하는 게 아닐걸? 그냥 좋아지는 거지. 내가 기타나 들고 다니니까 편해 보이냐?”

“아니야? 적어도 우리처럼 외줄 타기 하는 기분은 아닐 거 아니야?”

“네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나라고 쉽겠냐? 어렵기로 치면 내가 더 어렵지. 대학을 갈지 말지 하는데. 사실 내 코가 석자라 너 따라올 입장은 아닌데 내가.”

“그러게 너랑 나랑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따라왔어?”

그러자 재영이가 입술을 삐죽하더니 말했다.

“그러게… 아까 네 표정이 죽을 것처럼 힘들어 보여서.”

성우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놈은 사람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주현이가 널 좋아하겠지.”

“야!”

주현이가 제삼자가 되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뜬금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성우의 등을 세게 때렸다.

“맞잖아. 성주현, 너 솔직히 말해. 나 따라온 거야? 재영이 따라온 거야?”

성우가 등이 아픈지 몸을 배배 꼬면서 주현에게 물었다. 주현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진성우. 너랑 내가 쌓은 우정이 얼만데.”

“흥~ 지금 이 순간은 우정을 선택하겠다?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라고 말할 때는 손가락으로 성우 자신을 가리키고 ‘사랑’이라고 말할 때는 두 손바닥을 펴서 재영을 가리켰다. 주현이 다시 성우를 말리려고 손을 들어 올리자 성우가 주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두 사람의 장난이 사그라들고 날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배고파”

주현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셋은 모두 점심도 먹지 않았다. 성우가 뭉그적거리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 가자. 대신 가기 전에 재영이가 노래 하나만 불러줘라.”

재영이가 일어서더니 삐딱하게 서서 기타를 치는 흉내를 내며 노래했다.


나는 나는 계속 계속 놀기만 할 거야

머리가 다 하얘져도 그렇게 살 거야

따분한 건 안 할 거야 재미없잖아

절대로 안 할 거야

나는 나는 계속 계속 노래를 할 거야

900살이 된다 해도 그렇게 살 거야

어른 같은 건 안 할 거야 너무 힘들잖아

절대로 안 할 거야


그때 주현이 따라서 같이 노래했다.

슬프면 다 떠나가라 울래요

외로워도 엉엉 울래요

참기는 뭐 좋다고 참아요

아아 아예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내 맘대로 내 멋대로

그냥 막 다 할래

슬프면 다 떠나가라 우세요

외로워도 엉엉 우세요

참기는 뭐 좋다고 참아요

아아 아예

나는 원래 어른 아냐 그런 적이 없어

어른 같은 건 절대 안 해 너무 힘들잖아


운동장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수북이 자라 있었다. 이제는 야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해가 다 지고 어둑해진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을 때 저곳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엄마?”

“성우니? 우리 아들이야?”

미연은 목이 쉬어 있었다. 미연은 10년은 늙은 것 같은 모습으로 성우를 끌어안았다.

“엄마가 여긴 어쩐 일로?”

성우의 질문에 대답은 않고 미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됐어… 됐어… 다 괜찮아. 엄마가 미안해. 성우야, 엄마가 미안해….”

미연은 떨고 있었다. 성우가 알고 있는 엄마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동안 미연이 애써 감춰온 모습이었으리라. 성우는 엄마가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났다. 주현도 그것을 느꼈는지 한쪽으로 미연을 부축하고 계단에 앉아 쉬게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연이 제정신이 들었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너희들 밥 안 먹었지? 밥 먹으러 가자.”

성우는 다시 엄마가 돌아온 것 같아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엄마는 성우를 볼 때마다 밥 먹었는지를 먼저 물었다는 것을.

“배 고파. 짜장면 사주세요.”

“좋지. 이 근처에 진짜 맛있는 짜장면집 있어. 가자.”

성우와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그날 성우 엄마 미연은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엄마가 해야 할 일은 없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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