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1992년의 한 아이디어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건축가, 디자이너, 엔지니어들의 창작 활동을 혁신하며 전 세계적으로 백만 명 이상의 사용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로버트 맥닐(Robert McNeel)이 설립한 맥닐 앤 어소시에이츠(McNeel & Associates)의 라이노(Rhinoceros)는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3D 모델링의 민주화를 이루어낸 혁신의 상징이다.
라이노의 역사는 우연과 필요성의 아름다운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공인회계사 출신의 로버트 맥닐은 1980년대 건축과 엔지니어링 회사들의 회계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다가, 1985년경 고객들이 (오토캐드, AutoCAD)의 사용 지원을 요청하면서 자연스레 설계 소프트웨어 분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92년 5월, 적용 기하학(Applied Geometry, AG)이 자신들의 너브스(NURBS, Non-Uniform Rational B-splines) 지오메트리 라이브러리를 오토캐드(AutoCAD)에 통합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해왔을 때, 맥닐은 단 3일 만에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냈다. 이는 그의 문제 해결 능력과 혁신적 사고가 얼마나 빠르고 직관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초기에 라이노는 해양 설계 클라이언트들을 위한 오토캐드 플러그인으로 개발되었으나, 3차원 자유형 설계에는 오토캐드의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된 윈도우 애플리케이션으로 전환했다. 1992년 11월에는 스컬프투라(Sculptura)라는 이름으로 메시 모델러가 발표되었고, 1993년 11월에 너브스 기능을 갖춘 스컬프투라 2가 친숙한 이름 라이노세로스(Rhinoceros)라고 별명 지어졌다.
이 시기 1994년에 마이클 깁슨(Michael Gibson)이 인턴으로 입사하면서, 그가 대학생 시절 프로젝트로 만든 스컬프투라 메시 모델러가 라이노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적용 기하학의 박사인 데일 리어(Dale Lear)를 채용하면서 라이노는 진정한 기하학적 깊이를 갖추게 되었다.
오토캐드의 라이선스 분쟁으로 프로젝트명이 라이노세로스(Rhinoceros)로 확정된 후, 맥닐은 1994년 4월 공개 베타 테스트를 시작했다. 이 결정은 당시의 소프트웨어 산업 관례에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기업들이 완성된 제품만 출시했을 때, 맥닐은 미완성의 소프트웨어를 세상에 내놓고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귀기울었다.
1997년 9월에는 5만 명의 베타 사용자가 있었고, 1998년 7월에는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특별한 마케팅 활동이나 광고 없이도 입소문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라이노를 채택했다는 것은 소프트웨어의 우수성과 맥닐의 사용자 중심적 철학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무료로 소프트웨어를 배포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맥닐은 사용자들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요구를 발견하고, 그것이 개발 방향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러한 신념은 결국 옳았다. 3년간의 베타 테스트를 거쳐 1998년 10월 라이노 1.0이 공식 출시되었을 때, 이미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용자층이 존재했던 것이다.
라이노가 정식 출시된 후, 전 세계로의 확산은 매우 신속했다. 1998년 12월 첫 5,000개가 판매되었고, 1999년 1월에는 일본 버전이, 5월에는 한국 버전이 출시되었다. 라이노가 단순히 영어권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전 세계 디자이너들의 요구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2000년대 초반에는 라이노의 기능성을 확장하는 플러그인들이 속속 등장했다. 2001년 플래밍고(Flamingo)라는 렌더러가 출시되었고, 2003년에는 펭귄(Penguin), 2004년에는 봉고(Bongo)라는 애니메이션 도구가 선보였다. 이들은 라이노를 단순한 모델러에서 완전한 디자인과 시각화 플랫폼으로 변모시켰다.
2007년 라이노 4.0이 출시되면서 렌더링 기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리고 2008년 3월에는 그래스호퍼(Grasshopper)라는 혁신적인 도구가 추가되었다. 그래스호퍼는 비주얼 프로그래밍 언어로, 코드를 작성할 필요 없이 노드와 선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복잡한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파라메트릭 설계(parametric design)에 접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라이노의 가장 근본적인 강점은 너브스(NURBS) 기술에 있다. 너브스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곡선과 자유형 표면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동차 차체, 배의 선체, 유기적인 형태 등을 정밀하게 모델링할 수 있게 해준다. 폴리곤(polygon) 기반의 메시 모델링과는 달리, 너브스 표면은 작은 수의 제어점으로 매끄럽고 연속적인 표면을 표현할 수 있어서, 메모리 효율과 편집 용이성에서 탁월하다. 2012년 라이노 5.0이 윈도우에, 2015년 맥 플랫폼에 출시되었다. 특히 2015년 이후 전자 배송 시작으로 물리적 디스크 배송의 시대가 종료되었고, 라이노는 더욱 접근하기 쉬운 소프트웨어가 되었다.
가장 획기적인 진화는 2020년 라이노 7.0의 출시였다. 라이노 7에서는 서브디비전 써피스 모델링(SubD, Subdivision Surface Modeling)이라는 새로운 지오메트리 타입이 도입되었다. 서브디비스 은 면, 모서리, 꼭짓점을 직관적으로 조작하는 방식으로 복잡한 유기 형태를 빠르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라이노만의 고정밀 너브스 기술을 결합했다. 전통적인 메시 기반 서브디비전은 근사적이었으나, 라이노의 서브디비전은 고정밀도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로운 조형을 가능하게 했다.
2023년 10월 라이노 8이 출시되었고, 이는 윈도우와 맥에서 완전히 새로운 엔진으로 작성되었다. 슈링크랩(ShrinkWrap)이라는 메시 생성 도구, 서브디비전 주름(SubD weighted creases) 기능, 개선된 메시 부울 연산, 그리고 빠른 렌더링을 위한 사이클(Cycles) 엔진 업데이트 등이 포함되었다. 맥 사용자들을 위해서는 애플 실리콘 네이티브 지원으로 성능이 대폭 향상되었다.
라이노 8에서는 그래스호퍼의 기능도 한층 강화되었다. 직접 라이노 객체 속성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스호퍼에서 블록 정의와 인스턴스를 만들 수 있으며, 파이썬(Python) 3와 C# 스크립팅 에디터가 완전히 새로 작성되었다. 이는 라이노와 그래스호퍼 사이의 경계를 더욱 유연하게 만들었다.
라이노의 성공은 기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맥닐과 그의 팀이 사용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커뮤니티를 받아들였는지에 있다. 라이노는 오픈 소드케이(openNURBS) 이니셔티브를 통해 너브스 지오메트리 포맷을 공개했고, 써드파티 개발자들이 라이노를 위한 플러그인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도록 장려했다. 2007년 로버트 맥닐은 라이노의 철학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의 사용자들은 실제로 유용한 것을 제공할 때까지 업그레이드를 구매하지 않는 사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현재 사용자는 개발 과정에 참여할 수 있으며, 마지막 몇 달만 아니라 모든 단계에서 참여합니다. 우리는 다른 (캐드) 회사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각 새로운 릴리스의 방향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자에게 의존합니다."
현재 라이노는 건축가, 산업 디자이너, 제품 디자이너, 주얼리 디자이너, 조선사, 엔지니어 등 다양한 분야의 백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인 건축 회사들이 그래스호퍼와 라이노를 사용하여 복잡한 파라메트릭 설계를 구현하고, 3D 프린팅 기술과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과 함께 라이노를 활용하여 설계에서 제작까지의 워크플로우를 혁신하고 있다.
라이노는 또한 교육 분야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전 세계의 대학과 설계 학교들이 학생들에게 라이노와 그래스호퍼를 교육하고 있으며, 맥닐은 학생과 교육자들을 위해 대폭 할인된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있다.
3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라이노가 이루어낸 것은 단순히 기술적 우월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설계의 민주화, 창의성의 해방, 그리고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도구를 모두에게 제공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었다. 마치 석기 시대의 송곳이 인류의 손에 준 힘처럼, 라이노는 현대 디자이너의 손에 수학적 정밀성과 창의적 자유를 동시에 선사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