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글립스는 2011년 라이너 에글(Rainer Egle)에 의해 태어난 폰트 디자인 도구다. 그 탄생의 순간은 타이포그래피의 역사에서 조용하지만 깊은 영향을 미치는 시작이었다. 복잡한 소프트웨어 환경 속에서 타입 디자이너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손과 마음에 맞는 도구를 만들고자 한 하나의 진심 같은 시도였다.
당시 타입 디자인 시장에는 포트포드(FontForge)나 폰트랩(FontLab) 같은 도구들이 존재했지만, 글립스는 다른 철학으로 시작했다. 단순하고 맥락에 맞는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통해, 디자이너가 폰트 제작의 기술적 복잡성에 짓눌리지 않고 순수한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특히 벡터 그리기와 형태 재사용의 흐름을 혁신적으로 개선했는데, 이는 디자이너들에게 '이런 도구를 기다렸다'는 감정까지 불러일으켰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를 글립스의 제2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2.1부터 2.6까지의 버전들은 꾸준한 성숙과 확장의 과정을 거쳤다. 특히 2.4(2016년 11월)에서는 가변폰트(Variable Fonts)라는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고, 이는 단순히 기능 추가를 넘어 타이포그래피 산업 전체의 변화를 예감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디자이너는 이제 여러 무게감의 폰트를 각각 만들 필요 없이, 마스터 파일 간의 보간(Interpolation)으로 무한한 중간 단계를 생성할 수 있었다.
2020년 11월, 글립스 3의 등장은 하나의 선언이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만들자(Make Things You Love)'라는 철학 아래, 완전히 재구성된 아키텍처와 사용자 경험을 들고 나타났다. 코너 컴포넌트(Corner Components), 스마트 컴포넌트(Smart Components), 컬러 레이어(Color Layers) 같은 기능들은 글립스가 단순한 서체 제작 도구를 넘어 그래픽 디자인 전반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어진 3.0의 세부 업데이트들—3.0.1(2020년 11월)에서의 변수 웹폰트 익스포트, 3.0.3(2021년 6월)의 M1 맥 호환성 개선, 3.1(2022년 6월)의 안정성 강화—은 기술이 신뢰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었다. 2023년 2월에는 폰트 프루퍼(Font Proofer)가 분리 출시되어 교정 작업을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글립스 생태계가 점점 더 전문화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가장 최근의 버전들—3.3(2024년 12월)과 3.4(2025년 1월)—에서는 더욱 세련된 성능 최적화와 새로운 스크립트 지원(특히 아프리카 언어들)이 추가되었다. 이는 단순히 기술 진화를 넘어, 글립스가 얼마나 비서구 문화권의 타이포그래피 필요성을 진지하게 고민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라이너가 강조했던 '제품을 대중화하고, 서양 폰트뿐 아니라 전 세계 스크립트를 위한 도구로 만들자'는 신념이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말, 글립스는 브랜드 재편(Rebranding)을 감행했다. 뮤카(Mucca) 디자인 스튜디오와 협력하여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선보인 이 변화는, 글립스가 이제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타입 커뮤니티 전체의 목소리를 담은 플랫폼으로 성장했음을 상징한다. 웹사이트도 학습과 공유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14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글립스는 한 사람의 비전에서 시작하여 애플, 폭스바겐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신뢰하는 표준 도구가 되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항상 디자이너의 손길을 존중하고, 곡선 너머에 있는 의도를 읽으려는 겸손함이 있었다. 글립스는 단지 폰트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디자이너가 자신의 목소리를 형태로 빚는 과정을 한 발 물러서서 지켜주고 응원하는, 그런 종류의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