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디자인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믿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2012년 8월, 두 명의 브라운대 학생 딜런 필드와 에반 월리스는 피터 틸의 장학 재단인 '틸 펠로우십'에서 연구비를 받으며 한 가지 문제를 풀기로 결심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디자이너, 개발자, 프로덕트 매니저들이 여전히 불편한 방식으로 협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설계 업무는 이메일과 클라우드 드라이브의 반복이었다. 디자이너가 (포토샵 Photoshop)나 (스케치 Sketch) 파일을 만들면, 팀원들이 그것을 열기 위해 비싼 라이선스를 사고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야 했다. 버전 관리는 혼란스러웠고, 실시간 협력은 불가능했으며, 무엇보다 전체 팀이 같은 화면을 보며 의견을 나누기는 매우 어려웠다.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으로 변하기까지는 놀랍도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2015년 12월, 4년의 개발을 거쳐 처음으로 비공개 프리뷰를 출시했고, 그 다음해인 2016년 9월에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개 베타 버전을 선보였다. 그리고 또 다른 1년을 기다린 2017년, 드디어 유료 서비스로 전환했다. 설립부터 수익화까지 무려 5년의 시간이 흘렀다. 린스타트업(Lean Startup)이나 애자일(Agile) 방법론을 숭배하는 실리콘밸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형적인 실패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틸은 빠른 성장보다 비전의 철저한 실행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 신념이 옳았다.
혁신은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 왔다. 웹 브라우저에서 바로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것. 설치도 필요 없고, 어떤 운영체제에서도 작동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실시간으로 여러 사람이 같은 캔버스 위에서 함께 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피그마는 단순히 기존의 디자인 도구를 클라우드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 협업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했다. 개발자도, 프로덕트 매니저도, 투자자도 이제 같은 공간에서 디자인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능성이 증명되었다. 점진적으로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실시간 협업을 가능하게 하는 아키텍처, 버전 관리 기능, 컴포넌트 시스템, 브랜치(Branches) 기능으로 마치 깃(Git)처럼 디자인을 관리할 수 있게 된 것. 개발팀과 디자인팀이 코드의 방식으로 창작물을 다룰 수 있게 해준 것이다.
2022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도비(Adobe)가 200억 달러라는 인수 가를 제시했다. 역사상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가장 비싼 배수 Multiple x50)로 평가된 인수였다. 그 거액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다. 피그마는 순수 수익인 마진율이 90%를 넘었고, 고객 유지율은 150%에 달했으며, 전 세계 설계 전문가들의 표준이 되어 있었다.
어도비가 피그마를 원한 이유도 명확했다. 설계(Photoshop), 그래픽(Illustrator), 레이아웃(InDesign) 같은 수직화된 도구들을 보유했던 어도비에게 피그마는 전혀 다른 가치였다. 피그마의 사용자들은 개발자, 제품 디자이너, 프로덕트 매니저들이었다. 즉, 현대의 디지털 제품을 만드는 팀 전체가 매일 사용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운영체제(OS)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수는 완료되지 않았다. 규제 심사가 계속되면서 거래는 표류했고, 결국 어도비는 2023년 9월 인수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피그마는 더욱 독립적으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능이 추가되었다. 생성 설계(Generate Design), 매직 설정(Magic Settings) 같은 기능들이 디자이너의 반복 작업을 줄여주고 있다. (피그마 메이크 Make)라는 프로토타입 제작 도구도 나왔고, (피그마 드로우 Draw)라는 일러스트레이션 기능도 확대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피그마 사이트 Sites)라는 새로운 기능이다. 설계 결과를 곧바로 웹 페이지로 게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피그마 안에서 기획부터 설계, 개발 협력, 그리고 최종 게시까지 거의 모든 프로세스를 완결할 수 있게 되어 간다.
2024년, 피그마의 시장 가치는 100억 달러를 넘어 대략 120억~150억 달러로 평가받고 있다. 어도비 인수 시 200억 달러라던 가를 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독립적인 기업으로서 더 빠르게 혁신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설립한 지 13년, 온전히 웹 기반의 협업 설계 도구 하나로 디자인 산업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진정한 감동은 단순함에서 왔다. 한 장의 웹 브라우저 화면 위에서 여러 사람이 같은 무언가를 만드는 경험. 예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그것이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바로 피그마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