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로 읽는 디자이너의 진화 1.0
서울에서 탄생한 한 기술 기업의 이야기는 2007년, 한 청년이 품은 작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카이스트(KAIST)에서 의류 시뮬레이션을 연구 중이던 오승우 대표는 가상 의류 패턴 기술로 실제 의류 생산 과정을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 고민이 2009년 1월, 클로 버추얼 패션(CLO Virtual Fashion)이라는 회사로 구체화되었다. 함께한 것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 출신이자 벤처 경영인인 부정혁 대표였다. 두 창업자는 디지털과 패션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클로는 한 개의 제품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연구팀이 개발한 기술을 서로 다른 산업 현장에 맞게 분화시켰다. 게임과 영화 산업을 목표로 한 '마블러스 디자이너(Marvelous Designer)'와 의류 산업용 '클로 3D(CLO 3D)'가 그것이다. 마블러스 디자이너는 블리자드, 유비소프트 같은 게임 회사들과 웨타 디지털, 아이엘엠 같은 영화 스튜디오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액션 영화 '아바타(Avatar)'의 의상과 '겨울왕국(Frozen)'의 엘사 드레스가 이 기술로 탄생했을 때, 가상 의류 시뮬레이션 기술의 가능성이 전 세계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2011년 시리즈 A 펀딩을 확보했고, 2014년에는 400만 달러 규모의 시리즈 B 펀딩으로 자원을 확충했다.
클로 3D는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2014년 11월, 시뮬레이션 기능이 추가되면서 이루어냈다. 이제 디자이너들은 의류가 실제로 드레이프되고 움직이는 모습을 화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기술은 의류 산업 특히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업체들 사이에서 빠르게 채택되었다. 2015년부터 2016년 사이, 클로는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한 업체가 10, 20개의 의류 샘플을 제시할 때, 클로 사용 업체는 100개, 1000개의 색상 조합과 스타일 변형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비용이라는 현실적 이점 앞에서 업계는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기술이 쌓일수록 소프트웨어의 깊이는 더해졌다. 2015년 C-미러라는 한국 최초의 3D 가상 피팅 솔루션이 출시되었다. 2019년, 창립 10주년을 맞아 클로의 로고를 새롭게 디자인했는데, 파란색 기술감과 바느질 이미지가 어우러진 새로운 심볼은 기술과 감성의 결합을 상징했다. 같은 해, 클로 아카데미(CLO ACADEMY)라는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출범시켜 산업의 인재 양성에도 나섰다.
2020년 11월 클로 6.0의 출시는 새로운 이정표였다. 그래픽 카드(GPU)를 활용한 시뮬레이션으로 성능이 획기적으로 높아졌고, 아바타 크기 편집, 자동 재봉 기능 같은 직관적인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어도비의 서브스턴스 3D(Substance by Adobe) 기술과 통합되어 텍스처링의 정교함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이후 2019년부터 에픽 게임즈(Epic Games)와의 전략적 협력이 본격화되었다. 2023년에는 상호 지분 인수를 통해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과의 시너지를 강화했고, 메타버스와 게임 환경에서 디지털 의류가 살아 숨 쉬는 길을 열었다.
클로 5, 클로 7로 이어지는 버전업은 단순한 기술 개선이 아니었다. 각 버전마다 패턴 메이커, 디자이너, 제조 담당자, 마케팅팀 등 의류 산업의 모든 계층을 배려하는 기능들이 누적되었다. 링크된 편집 기능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360도 파노라마 렌더링은 가상 쇼룸의 경험을 넓혔다. 인공지능 기반 그래픽 생성기, 자동 아바타 얼굴 변환, 파 맵 지원 등은 창의성의 범위를 계속 확장했다.
2020년 스왓온(SwatchOn) 인수에 이어, 최근 2025년 스와치북(swatchbook) 인수는 클로를 세계 최대의 디지털 패브릭 데이터베이스 회사로 도약시켰다. 조직도 진화했다. 서울 본사는 물론 로스앤젤레스, 동관, 방갈로르에 오피스를 두고 전 세계 디자이너, 공장, 브랜드들과 연결되었다.
처음 비전에서 출발한 회사는 이제 단순한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아니다. 클로셋(CLO-SET)이라는 디지털 에셋 관리 플랫폼, 커넥트(CONNECT)라는 디지털 패션 허브 마켓플레이스, 전자상거래 가상 피팅 서비스로 생태계를 구축했다. 디자인에서 생산, 마케팅, 스타일링에 이르는 의류 산업의 전 과정을 디지털화하는 방향으로 진화 중이다.
17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클로는 13번의 메이저 버전 업데이트와 수백 개의 기능 개선을 거쳤다. 물리 기반 패브릭 시뮬레이션 기술은 더욱 정교해졌고, 실시간 렌더링 능력은 게임 엔진 수준으로 나아갔다. 의류는 더 이상 현실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쌍둥이로 메타버스에서 살아가고, NFT로 거래되며, 증강현실로 입혀본다.
클로의 창립자가 예견했던 미래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현실이 되고 있다. 어느 날 아이가 애니메이션에 나온 옷을 사 달라고 하면, 그 옷이 맞춤 제작되어 집에 도착하는 세상 말이다. 그 세상의 입구에 클로는 이미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