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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속에 혼란을 찾게 되고, 머지않아 혼란 속에 평화를 원하게 된다.
처음에는 순전히 평화만을 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평화 속에선 자극을 찾을 순 없었고, 자극을 찾아 돌린 눈은 혼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짜릿하고, 내디딘 첫걸음에 묘한 전율이 느껴진다. 내가 이쪽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잘 맞기도 하며, 새로운 혼란이 익숙한 평화가 되어간다. 사는 주소가 평화에서 혼란으로 완전히 바뀐 뒤에 보이는 세상은 다르다.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순진하게 살아가는 저들이 어려보이기도 하다. 일평생 바른 걸음만을 걸어갈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 할 새로운 세계, 그리고 그곳에 살아가는 내가 세련된 어둠을 발한다.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지만, 점점 차가워진다.
머리는 빠르게 식어가지만, 점점 진해진다.
점점 깊어지는 혼란은 날 삼킨다. 아,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이젠 다시 빛을 쬐고 싶지만, 과거의 관성은 여전히 강하게 남았고, 한동안의 미래를 계속해서 혼란 속으로 끌어당긴다. 누군가가, 뭔가가, 상황이, 환경이, 어떤 이유로든 날 멈춰줬으면 한다. 그때 떠오르는 평화, 가족, 부모님. 잘 지낼 때는 떠올릴 일이 없다가, 마지막의 마지막이 돼서야, 아무도 잡지 않은 내 손을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그리워한다. 병원 같은 존재. 아플 땐 제발 살려달라며 매달리다가도, 건강을 모두 회복하고는 찾지 않는다. 몇 번이고, 몇백 번이고, 또 반복한다. 그럼에도 병원의 문은 닫지 않았다.
병원.
사실, 나도 그들의 병원 중 하나다.
나도 그들의 평화일 때가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내가 처음으로 그들의 품에 안겼을 때.
내가 처음으로 그들을 불렀을 때.
내가 첫 걸음을 걸었을 때.
내가 처음으로 사회에 섞여 들 때.
내가 졸업했을 때.
내가 장학금을 받았을 때.
내가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내가 듬직하게 그들을 안을 때.
내가 활짝 웃을 때.
내가 평화 속에 존재할 때.
내가 평화 속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 그들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난 평화 속에 존재해야 한다. 나 역시 내 평화로 평화로워진 그들의 평화로 내 평화를 찾을 수 있다.
내 어린 어리석음에 자극을 찾아 혼란에 빠지곤 하지만, 그들의 도움으로 또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 난 내가 그들처럼 기복 없는 절대적인 평화가 되었으면 한다. 언젠가 그들에게 병원이 필요할 때, 문이 닫혀 있으면 곤란할 테니까.